"네덜란드 어린이들은 12세에 진로를 탐색하는 시험을 칩니다."
암스테르담대(Universiteit van Amsterdam)에서 지구의 미래학과(Future Planet Studies)에서 공부하고 있는 스카우트(Scout)의 말이다. 스카우트는 닉네임이다.
네덜란드는 초등학교 이후 직업 관련 학교, 인문계 등으로 나뉘어 진학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직업에 대한 전문성을 어린 시절부터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너무 일찍 선택하도록 하는 것 아니냐 에서 판도 있다. 그래서 선택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 역시 제공하고 있단다.
스카우트 자신도 원래는 대학에 올 생각은 없었다고.
네덜란드에서는 직업의 귀천도 아예 없다고 하진 못하지만 전반적으로 크게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찍부터 직무 연관성을 익히며 자신의 적성과 정합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 보니, 사교육에 대한 생각도 크지 않다.
이를 증명하듯 네덜란드의 대학 진학률은 30% 정도다. 대학을 가려는 학생들의 경쟁률이 높지 않고, 오히려 경쟁은 입학하고 나서부터 시작이다.
스카우트는 학교에서 종 멸종이나, 오염물 생산에 따른 처리 등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 역시 대학 입학은 쉽게 했지만, 졸업은 물론 다음 학년을 올라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다고 했다.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유급하지 않고 무사히 졸업에 성공하는 이들은 25~30% 정도라고.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은 건 학력 인플레 요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졸업이 쉽지 않은 현실도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꼭 가고 싶은 사람만 대학에 가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할까. 대학 나온 것과 나오지 않은 것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고, 서로가 가진 전문성과 직업을 이해하는 것.
물론 대학을 나온 이들이 취업도 쉽고, 높은 연봉을 받지만 대학 다닐 시기에 일을 해서 소득을 얻은 사람과 비교하면 한 평생 소득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네덜란드가 강소국이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일까.
피터(Peter)는 목장주다. 고교 졸업 이후 부모님의 목장을 물려받아 소를 키우고 있는데, 애초에 대학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목장에서 일을 한지 벌써 10년이 됐다고 했다. 스마트 팜 견학을 가는 길에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가던 중 다리가 아파 자전거를 빌리러 들어갔다 말을 걸며 가까워졌다. 낯선 이의 방문에 흔쾌히 자전거도 빌려주었고, 자신이 관리하는 축사도 스마트 농장이라며 우유 짜는 장면과 전자동 청소기 작동 장면도 보여주었다.
처음 스마트 설비를 갖추었을 때 여러 나라에서 견학을 왔는데, 그 중엔 한국 사람들도 있었단다. 자신은 이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네덜란드는 첨단 농업기술로 앞서가고 있는데, 자부심도 꽤 느끼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는 청소년에게 성공의 기준으로 좋은 대학 합격, 연봉 높은 직장의 취직 등을 제시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미래의 선택지를 넓히는 교육 체계를 갖추고 개인의 선호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주려 노력할 뿐.
아울러 외국어 교육이 상당히 활발해, 국민의 대다수가 네덜란드어와 함께 영어를 할 줄 알고, 또 상당수가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4개 나라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한단다.
스카우트나 피터 역시 4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했는데, 꼬맹이 영어 능력으로 이것저것을 묻는 나는 엄청난 자극을 받기도 했다. 외국어를 기본 능력으로 갖추니 이들은 취업할 때 눈을 여러 나라로 돌릴 수도 있다.
특히 스카우트가 다니는 학과의 경우 3학년이 되면 유학을 떠나 학업을 이어가는 프로그램인데, 언어 장벽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러한 교육 철학을 갖춘 곳은 또 있다. 바로 아일랜드다. 인구 약 500만의 아일랜드 역시 강소국으로 꼽힌다. 기네스 맥주와 아이리시 커피로 유명하고,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강제 지배를 당한 경험 때문에 영국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간직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급성장하며 '리피 강의 기적'을 만들어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2011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다.
이후 2년 만에 IMF를 조기 졸업한 아일랜드는 낮은 법인세와 유연한 노동시장을 통해 구글,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을 불러 모아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국과도 비슷한 면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교육은 어떠할까.
아일랜드에서는 만 4세에 초등과정(primary school)에 들어간다. 초등과정이 8년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일찍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 만 4세와 5세 때는 유치원 과정이다.
초등학생이 되기 위한 준비를 따로 유치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한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입학은 만 7세의 한국보다 1년이 빠르고, 이후 중고등학교(secondary school) 5년(3학년 말 junior certificate·5학년 말 leaving certificate)을 보내면 만 18세에 대학이든 사회든 1년 먼저 나설 수 있다.
아일랜드의 조기 입학 체계를 보며 당시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일었던 어린이집 부족 사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는 학교 공간에 0학년을 만드는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물론 교육 기관이 민간과 공립으로 나눠졌고, 관리 부처 역시 교육부와 여성가족부로 나누어져 있는 체계를 손보는 등의 과제가 있지만 말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채우면서도 이곳에서 눈여겨 본 제도가 있다. 바로 자유학기제다.
지금 한국의 중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자유학기제가 아일랜드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이루어지는 전환학년제(Transition Year)가 그것이다.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는 중고교 과정을 일컫는 세컨더리 스쿨의 중간인 4년 차에 주어진다. 3년 차 말에 주어지는 시험을 거친 학생들에게 휴식과 진로 탐색, 갖가지 사회 경험을 하도록 1년이 주어진다. 아일랜드 역시 한국처럼 타이거 맘과 교육열이 매우 높은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특이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 교육부는 전환학년제가 학생이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또래들과 더 많이 어울릴 수 있도록 돕는다고 평가한다.
학생의 개인적, 사회적, 교육적, 직업적 발전을 장려함으로써 자율적인 참여를 이끌어 낸다. 그로 인해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1년 동안 학생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기업체, 비정부기구(NGO), 여행, 창업, 교환 학생, 아르바이트, 법조계, 스포츠, 운전 등 방대한 분야를 자랑한다.
본 프로그램은 사안에 따라 학교에서 진행하는 것도 있지만, 주로 외부 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프로그램을 마련해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또 일부는 부모와 함께 참여하거나 아예 학생 스스로 직접 계획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결국 교육부와 학교 그리고 지역 사회가 함께 이 제도를 성숙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모든 학교에 의무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전환학년제(Trasition Year)를 선택할 권한이 있고, 또 선택한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이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
이 제도는 1974년 9월 시범사업으로 처음 소개된 뒤, 일부 학교와 학생들만 선택할 뿐 다수는 여전히 입시 위주의 학교 프로그램을 따랐다. 그러나 1994년 본격적으로 교사 연수 프로그램 등 직무 교육을 확대하는 등의 제도가 활성화 한 뒤, 2001년 38.4%, 2008년 50%, 2012년 61.5%, 2017년 67%의 비율로 TY를 선택하는 학교와 학생들이 증가했다.
교육부 전환학년제를 담당하는 NCCA(National Council for Curricuium and Assessment)의 호난(honan) 국장은 자신의 자녀도 법원의 공판 현장을 다니며 법과 적용의 사례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아울러 "전환학년제는 의사소통 기술과 문제 해결 능력, 팀워크 등 전반적으로 소통과 관계의 능력을 향상시켜준다"며 "대부분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기획 단계부터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좋은 전환학년제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사회는 전환학년제의 실효성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해 왔다.
2009년에 빌컬린이라는 사업가가 "안락함에 빠진 기간(doss year)"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기간에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들어 학업 증진에 방해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또 프로그램 중 일부는 부모의 재정 지출을 압박해 전환 년에 참가하는 학생들 사이에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재정 상태 때문에 자녀가 전환학년제를 선택하려 해도 뒷받침하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환학년제를 선택하는 비율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감이 높아지고, 무엇보다 1년 동안 이러한 경험이 진로 탐색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NGO에서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해보는 등 어른들과 사회의 보호 속에서 사회 생활을 해보는 경험 자체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 가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도 전환학년제에 참여한 학생들이 졸업 시험 결과가 더 우수하다는 것도 제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명분을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타이거 맘으로 표현되는 교육열이 존재하는 아일랜드의 특성과 1년의 자유가 주어지는 두 가지 조건이 만나면, 이른바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의 시간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호난 국장은 그러나 "대부분 참가자는 제도의 취지 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청소년에게 안식년을 허락하는 나라는 아일랜드 말고도 영국과 덴마크 등도 있다. 또 대부분 유럽과 오세아니아 나라들은 고교 졸업 직후 대학 진학 트랙이 아닌, 세상을 경험하기 위한 갭 이어(Gap Year) 트랙의 선택도 많이 이뤄진다.
내가 여행 다니며 만난 세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갭이어 프로그램의 하나로 세상의 다양한 문화와 사람, 새로운 제도와 풍경을 만끽했다. 스스로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질문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여유 시간을 갖는 이유가 충분하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경쟁에만 쫓기며 여유를 잃고,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이 적다. 상대와 협력하는 힘이 떨어지고, 스스로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모른다.
좋은 대학과 대기업,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만을 쫓는 지금의 세태로는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한계가 있다. 더구나 부동산과 주식, 비트코인 등 순간의 게임으로 넘사벽 삶의 격차를 만들어버리는 지금의 사회 체계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네덜란드나 아일랜드가 지고지순한 선은 아닐 것이다. 문제가 많은 교육 제도라고 생각하지만 또 어떤 나라의 대통령은 우리 교육을 칭찬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해마다 정시 수시 논쟁을 통해 결국 허상인 '공정' 담론에 기대어 정시 비중을 높이고, 이를 통해 사교육 시장에 노후 비용을 투입시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실패자로 만드는 세상에서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