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자랑하는 지역이 꽤 있다. 이름난 예술가와 박물관을 유치해 소외된 지역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대개는 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로 진행된 결과물이다. 고고학적 자료나 역사적 유물 또는 예술품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박물관 본래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감히 경주 남산을 능가할 곳은 없다. 남북 8km, 동서 4km 규모의 작은 산이지만 13기의 왕릉을 비롯해 4개의 산성을 품었고, 150개 절터에 130기의 불상과 100여 개의 불탑이 온 산에 흩어져 있다. 모두 합하면 700점에 이른다니 산 전체가 신라 유적지이자 불교 박물관이다.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서울 남산이 조선 왕조의 수도인 한양의 남쪽이라면, 경주 남산은 신라 궁성인 월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산의 북쪽 끝머리는 월성과 닿아 있다. 드넓은 평지를 이루는 경주 시내 어디에서도 지평선에 걸린다. 결코 웅장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작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산도 아니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5m)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30개가 넘는 골짜기를 형성하며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용장골ㆍ약수골ㆍ절골ㆍ탑골ㆍ.삼릉계 등 계곡마다 불상과 불탑을 품고 있으니 하루에 완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개는 삼릉계곡으로 올랐다가 금오봉을 거쳐 용장골로 내려오는 코스를 걷는다. 산의 서쪽이어서 ‘서남산코스’로 불리는데 이 길만 해도 6.1km다. 보통 4시간가량 걸리고, 문화재에 신경 쓴다면 5~6시간은 잡아야 한다. 하절기에는 오전 4시부터 입산할 수 있고, 오후 5시 입장 마감이다. 중간에 샘이 없으니 마실 물을 넉넉히 챙겨야 한다. 화장실은 금오봉 바로 아래에 한 곳 있다.
본격적인 등산에 앞서 삼릉을 지난다. 명칭 그대로 세 개의 신라 왕릉이 잇닿아 자리하고 있다. 제8대 아달라 이사금,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아달라 이사금과 두 왕의 연대 차가 너무 커서 의문이 드는데 모두 박씨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는 박ㆍ석ㆍ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이었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는 박씨 왕릉이, 동쪽에는 김씨 왕릉이 많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나정(蘿井)도 삼릉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다.
사실 무덤보다 더 유명한 건 능을 호위하고 있는 울창한 솔숲이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일반 소나무와 달리 구불구불한 가지가 엇갈리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가 자욱하거나 눈이 내린 날, 또는 아침 햇살이 비끼는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뿜는다. 강운구ㆍ배병우 등 유명 사진작가들의 작품으로 한번쯤은 접했을 그림 같은 풍경이다.
삼릉을 지나면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초입은 야자수 매트가 깔려 가벼운 산책로 수준이다. 약 500m를 오르면 길가에 목이 잘린 불상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이곳부터 산마루 바로 아래의 작은 절간인 상선암까지 줄줄이 불상이 이어진다. 바위를 깎아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조각한 마애불, 실선처럼 윤곽만 남은 선각 마애불이 각각 3곳, 온전한 조각 형태인 석조 좌상도 2개나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서 있는 부처, 앉아 있는 부처가 등산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때로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때로는 높은 바위 언덕에서 은근한 부처의 시선이 느껴진다. 신실한 불자라면 등산로 자체가 구도의 순례길이다. 정상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해탈로 들어서는 과정이자, 불국 정토를 갈망했던 신라인의 숨결과 동행하는 길이다. 샛길로 들어가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안내판이 잘 설치돼 있어서 불상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재미를 붙이면 바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선이나 주름도 혹시 조각이 아닐까 다시 보게 된다.
이 구간에서 가장 돋보이는 불상은 상선암 바로 뒤 거대한 바위에 조각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으로, 앉아 있지만 높이가 6m에 달한다. 불상을 새긴 바위 위로 또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층층이, 겹겹이 포개져 봉우리 자체가 거대한 광배처럼 보인다. 낙석 위험이 있어 불상 바로 앞으로 지나는 탐방로가 폐쇄돼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대신 옆으로 우회하는 길을 통해 능선에 오르면 불상뿐만 아니라 그 아래로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마을과 들판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불상이 새겨진 봉우리 뒤편으로 어렴풋이 경주 시내의 모습도 보인다. 애초에 멋진 풍광을 바라고 오른 게 아니어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반갑다.
이곳부터 정상인 금오봉까지는 순탄한 능선길이다. 다소 펑퍼짐한 지형의 정상에는 표석이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주변 전망도 나무에 가려져 있어 남산의 명성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하다. 용장골로 내려가는 길 역시 동네 산길처럼 수더분하다. 임도처럼 넓게 닦인 내리막길을 걷다가 ‘용장마을’ 팻말을 따라 다시 등산로로 들어선다. 숲이 울창한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어서 다소 지루하고 맨숭맨숭하다 싶을 때쯤, 평범한 흙길이 갑자기 암벽 낭떠러지로 변한다. 거친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그림 같은 자태를 뽐낸다.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어쩌면 이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고하게 선 소나무 뒤로 맞은편 산자락이 걸리고, 그 아래는 까마득한 계곡이다.
발 아래만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낭떠러지 끝에 매끈하고 새하얀 석탑 하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뜻밖의 반전, 비현실적 풍경에 넋을 잃고 오도카니 서서 주변을 살핀다. 맞은편 고위봉 자락의 녹음은 짙어만 가고, 아득하니 펼쳐지는 들판도 푸르름을 더해가는데 삼층석탑만 홀로 말갛고 고고하다. 용장사터 삼층석탑이다. 자연석에 홈을 파고 탑을 세웠으니, 떠받히고 있는 바위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기단인 셈이다.
바로 아래의 석조여래좌상도 잠시 딴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3단의 원형 석좌 위에 곡예를 하듯 불상이 얹혀 있다.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안정감 있다. 머리가 없어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그윽하고 평화롭게 산 아래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을 듯하다. 바로 옆 바위에는 연꽃 위에 가부좌를 튼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가사와 머리의 돋을새김이 섬세하다. 세 유적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불상 아래 절터도 온전한 전각 하나 짓기 힘들 정도로 옹색하다. 집 지을 터가 부족하니 불상과 불탑이 자연스레 산으로 올라간 구조다. 남산의 절집이 대부분 이런 지경이었으니 결국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찰이고 불국토였다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용장사터에서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기는 한가지지만 암벽 대신 숲길이어서 걷기에는 한결 부드럽다. 이런 길을 약 500m 내려가면 드디어 계곡과 만나고, ‘설잠교’라 이름한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설잠(雪岑)’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시습(1435~1493)의 법명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는 단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운 뒤 만 20세에 방랑의 길을 떠났다.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30세에 이곳 용장사에 들어와 7년간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니 대표적 저작이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다.
용장골은 큰길에서 아주 멀지는 않지만 계곡이 깊고 한갓진 편이다. 용장마을까지 내려오는 동안 물가에 앉아 쉴 만한 너럭바위가 더러 있는데, 요즘은 물이 적어 계곡의 정취를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다. 용장마을에서 출발지인 삼릉 입구로 돌아올 때는 내남치안센터에서 시내버스(약 30~40분 간격)를 이용하면 된다. 삼릉과 함께 둘러볼 유적지로 미소가 천진한 삼불사 석조여래삼존입상, 신라 왕실의 별궁인 포석정이 있다. 임금과 신하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자,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을 받아 비극적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남산의 유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매주 토ㆍ일요일 무료로 진행하는 답사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평일 답사는 홈페이지 예약자에 한해 유료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