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팩 수거해도 로고·크기 탓 재사용은 절반 그쳐

입력
2021.05.12 04:30
12면

[쓰레기를 사지 않을 권리] <10> 아이스팩


편집자주

기후위기와 쓰레기산에 신음하면서도 왜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덩어리를 생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요. '제로웨이스트 실험실'은 그동안 주로 소비자들에게 전가해온 재활용 문제를 생산자 및 정부의 책임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당신의 냉장고엔 미세플라스틱 덩어리가 있다. 신선식품과 함께 배송된 아이스팩 얘기다.

물에 플라스틱인 고흡수성폴리머(SAP)를 섞어 얼음보다 더 오래 얼어있는 아이스팩은 어떻게 버려도 환경오염을 야기한다. 환경부는 아이스팩을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라고 하지만 소각이 잘 안 되거나 매립 후 플라스틱이 남는다. 아이스팩을 잘라서 내용물만 하수구에 버린다면? 미세플라스틱을 강에 투입하는 꼴이다. 지난 5년간 국내에서 이 같은 아이스팩이 약 9억2,000만 개 생산됐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아이스팩 수거사업’을 시작하며 재사용을 위해 노력하고는 있다. 하지만 어려움이 크다. 사업을 중단하거나 계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고심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이유가 뭘까. 아이스팩의 품질 문제가 아닌, 아이스팩 표면의 로고나 크기 등의 문제이다.

지자체가 각 가정의 아이스팩을 걷어 전통시장 등 필요한 곳에 무료로 나눠줄 때, 기업 상호나 로고 등이 표시돼 있어서 상인들이 재사용하는 데 난색을 표한다. 또 너무 크거나 작은 것도 꺼려한다. 아이스팩을 사용하는 유통업체들이 디자인을 변경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이 단순한 문제가 기업들의 방관으로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아이스팩 수거함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증가해 5월 현재 전국에 633개가 설치됐다. 이렇게 수거한 아이스팩 중 실제 재사용이 되는 건 약 절반에 그친다고 한다.


기업 로고, 부직포··· 재사용 막는 조건들

지난 4일 서울 강동구청을 찾았다. 강동구는 전국에서 아이스팩 수거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해 재사용체계가 가장 잘 갖춰진 곳이다. 2019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수요처를 많이 늘려온 덕에 다른 지자체보다 재사용률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런 강동구도 재사용률은 65% 정도이다. 다시 쓸 수 없는 제품이 상당 부분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날 강동구청에 설치된 아이스팩 수거함을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간 수거된 아이스팩은 295개였는데 이 중 85개(29%)가 ‘불량’ 판정을 받았다. 강동구 공무원과 지역 환경단체인 환경오너시민모임 회원들이 선별한 결과다.

불량으로 분류된 대표적인 경우는 특정 회사의 상호나 로고가 들어간 아이스팩이다. 재사용인 것이 쉽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시장에서 수산물을 판매하는 김익선(49ㆍ가명)씨는 “대형마트 광고가 새겨진 아이스팩을 받아서 택배용으로 넣었다가 고객이 '깨끗하지 않다'며 크게 항의한 적이 있다”며 “세척한 아이스팩이라도 남이 쓴 걸 받는 건 꺼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상당수의 아이스팩이 이 같은 이유로 품질에 문제가 없어도 버려진다. 이에 일부 가게나 지자체에서는 아이스팩 위에 스티커를 붙여서 상호를 가리는 시도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스티커 부착 비용이 들고 접착제로 인해 아이스팩이 빠르게 오염되는 등 한계가 있다.

포장재가 부직포인 아이스팩도 재사용이 어렵다. 위생 때문이다. 부직포 아이스팩은 결로현상(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이 적기 때문에 임산물이나 축ㆍ수산물 배송에 많이 쓰인다. 하지만 겉면 오염을 쉽게 닦을 수 있는 비닐과 달리 부직포는 한 번만 써도 쉽게 오염이 된다. 치과에서 나눠주는 아이스팩이 대표적 예다. 비닐 사용을 줄이는 취지로 도입된 코팅종이 아이스팩도 역시 오염되기 쉬워 다시 쓰기가 어렵다.

크기도 중요하다. 신선식품 유통 과정에서 주로 쓰이는 아이스팩의 크기는 가로 15㎝, 세로 20㎝ 정도다. 최근 4인 가구는 물론 2인 이하 소형 가구의 택배 주문도 늘었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

하지만 이날 수거함에서 나온 아이스팩 중에는 길이가 40㎝가 넘는 것은 물론, 가로 5㎝, 세로 5㎝로 성인 손보다 작은 것도 있었다. 특수 크기의 아이스팩을 사용하고자 하는 매장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까진 드문 실정이다.

충전식 아이스팩도 재사용이 어렵다. 입구가 트여 있어 사용자가 직접 냉매를 넣을 수 있는 구조인데, 냉매량이 일정하지 않은 게 문제다. 최병옥 강동구 청소행정과 주무관은 “충전식 아이스팩은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동 중 터질 위험이 있거나, 물이 너무 적어서 보냉 효과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경우 충전재가 물이라면 따라버리고 포장재만 분리배출하면 된다. 하지만 SAP가 섞인 경우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업체들, 광고 때문에 아이스팩 로고 고집

아이스팩 재사용이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특정 회사나 상품의 로고가 없어야 한다. 화려한 색깔이나 디자인이 없는 흰색 아이스팩이 가장 좋겠지만, ‘아이스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거나 눈꽃ㆍ북극곰 등이 인쇄된 정도도 무방하다.

환경부도 재사용이 용이한 디자인을 알고 있다. 지난해 7월 ‘아이스팩 재사용 활성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아이스팩 제조사 22곳과 유통사 19곳에 배포했다. 아이스팩 재사용 활성화를 위해 △판촉을 위한 과도한 마케팅 요소 표시를 지양하고 △SAP 아이스팩 여부를 포장재에 표기하며 △대(22×27㎝)ㆍ중(15×20㎝)ㆍ소형(12×17㎝)의 권장 규격으로 제조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이다. 환경부는 “가이드라인은 생산업체가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이라며 “이를 실제로 적용한 업체 수는 확인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작 아이스팩 제조사들은 가이드라인 준수가 언감생심이라는 반응이다. 디자인 결정권은 주문업체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팩 생산업체인 A사 관계자는 “우리 제품을 주문하는 고객에게 ‘가이드라인을 지키자’고 먼저 권하기는 쉽지 않은 입장”이라며 “주문 업체들은 보통 홍보를 위해 로고 등 특정 디자인을 먼저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 우리는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결국 아이스팩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유통업체들부터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브랜드를 알리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주된 반응이다. 아이스팩 겉면에 특정 상품명을 넣은 셀로닉스 측은 “어차피 자사의 제품 배송에 쓰이는 것인 만큼 기업을 알리는 용도로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아이스팩 대부분을 주로 정육ㆍ굴비 등 선물세트에 사용하는데, 배송받는 고객이 롯데백화점에서 구매한 상품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로고를 넣었다”고 답변했다. 이유식 전문업체인 베베쿡은 “사업 초기 회사를 알리기 위해 아이스팩에 상호를 넣었다”며 “현재는 이유식 정기배송 시 아이스팩을 같이 수거하고 있어 우리 아이스팩이 맞는지 구분을 위해 상호를 유지중이다”라고 답변했다.

아이스팩, 물로만 채울 수 없나

물론 SAP 아이스팩 생산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아이스팩의 악영향이 알려지고 정부도 친환경 냉매 사용을 권장하면서 물이나 식물 영양제를 사용한 대체 아이스팩을 사용하는 업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소비자원의 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식품 유통사 32곳 중 17곳이 친환경 아이스팩으로 전환 계획을 밝혔다. 롯데백화점을 비롯해 한국일보가 취재한 업체들도 향후 계획이 있다고 답변했다. 환경부도 2023년부터 SAP 아이스팩에 1㎏당 약 300원의 폐기물 부담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SAP 아이스팩이 쉽게 사라지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폐기물 부담금을 더한다고 해도 SAP 아이스팩은 물 아이스팩에 비해 개당 약 30~50원 정도 더 비싸질 뿐이다. 더욱이 SAP 아이스팩에 비해 물 아이스팩의 보냉효과가 약 30% 떨어져 SAP 아이스팩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업체들도 있다. 농협의 축산물 판매법인인 한우지예 관계자는 “한우 배송은 보냉이 생명이라 우려가 많다”며 “겨울에는 보냉에 지장이 크지 않아 물 아이스팩을 쓸 수 있지만, 여름에는 불안해서 SAP 제품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자체의 재사용 사업, 좌초 위기

아이스팩 수거 사업을 시작한 각 지자체들은 사업 지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성동구는 2019년 하반기 사업 시작 후 1년간 수요처 문제로 잠시 사업을 중단했었고, 송파구는 올해 3월부터 사업을 일시 중단했다. 올해 초부터 사업을 시작한 서울 구로구, 관악구 등도 사업 유지가 불투명하다는 입장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아이스팩을 수거함에 넣는 사람은 많은데 쓰려는 사람은 없어 사실상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아이스팩 재사용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명순 환경오너시민모임 대표는 “시민단체로서 아이스팩 규격 변화를 수차례 요구했지만 요지부동인 기업이 많았다"며 "정부가 재사용이 용이한 아이스팩의 규격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아이스팩 보증금제 등을 도입해 대형 유통업체에서만이라도 책임지고 재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영상제작 현유리 PD
송진호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