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끝이 보인다.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들 있다. 몇몇 나라의 모습일망정 마스크를 벗은 일상에 안도하고, 우리도 11월 또는 그보다 늦어질지 모르지만 그런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생긴다. 여전히 날마다 새로운 코로나19 확진자 기록이 나오고 있지만 지난 1년 반에 비하면 남은 희망고문쯤은 눈 몇 번 감는 격이다.
관심은 그 끝에서 우리가 찾을 일상에 모아진다. 팬데믹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커넥티드 세계에서 우리는 안전해진 걸까, 복원될 일상은 또 무슨 의미일까. 코로나 첫해엔 세계를 덮친 위기를 놓고 많은 문제가 제기됐다. 공동체 이슈가 된 돌봄에서 민주주의의 위기, 학교 생태계, 노동 문제까지. 추격이 아니라 추월의 시대여야 한다는 탈성장의 담론도 호소력을 더했다.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가졌는지도 코로나는 명백하게 드러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역사상 최초로 조만장자가 되는 사이 많은 이들은 수입이 줄거나 가계 문을 닫아야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많은 국가들은 긴축이란 이름으로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시켰다. 반대로 이번에는 국가 역할이 훨씬 커지자, 바이러스의 힘으로 강력했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삐죽삐죽 못이 박힌 덩어리 모양의 코로나는 어떤 것보다 다양한 이슈를 던진 게 사실이다.
우리가 경청의 시간을 가졌다면 K방역에 버금가는 포스트 코로나를 위한 K맵 정도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논의와 전망에 무관심하다.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위한 세대론과 정체성, 젠더 문제 등이 이슈로 부각되고 K방역, 백신 문제는 눈 높이가 다른 말들을 할 뿐이다. 사회적 가치 배분의 실험이어야 할 백신접종 문제도 접종의 효율성에 묻혀 버렸다. 고장 난 스프링클러처럼 탈진실이 사방에 뿌려지거나, 코로나 국뽕들의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도 여전하다. 이런 행태들은 사실 필요한 변화에 대한 내성만 키우고 있다. 코로나는 강력한 정부, 포퓰리스트를 좋아한다. 인도의 모디 총리와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 아래에서 코로나가 창궐 중이고, 미국도 트럼프 집권 시절 최악의 상황을 거쳤다. 하지만 미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팬데믹의 교훈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건 정부의 크기가 아니라 능력이라고 했다. 나의 위기를 보살펴 주는 데는 강력한 정부보다는 효율성을 갖춘 정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 이전으로 당장 돌아가는 일은 어렵다. 백신은 희망의 빛이긴 하지만 아직은 일부의 해답에 불과하다. 더구나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는 작년 초반 6개월간 1,113만 명이던 게 최근에는 2주 만에 1,144만 명을 넘었다. 일상복귀를 입에 올리는 게 무안한 수치지만, 그렇다고 팬데믹이 들춰낸 문제들이 저절로 사라질 리는 없다. 일상이 정상을 뜻하지도 않고, 코로나가 드러낸 과거 일상도 이제는 정상은 아니다. 어떤 가치로 일상을 재구성할지 청사진을 마련해야 할 때이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많은 문제들은 일상복귀에 무임승차할 수밖에 없다.
개구리의 문제는 따뜻해지는 솥이 죽음의 트랩이 될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데 있다. 더 영리할지는 모르나 인간도 세계가 천천히 데워지는 솥이란 것에 무지하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이번 팬데믹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가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면 어떤 위험이 찾아오는지 늦게야 알게 된다. 애덤 그랜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실험한 결과, 물이 뜨거워져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개구리는 솥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자칫 사람만이 문제의 솥에 남아 있게 될지 모른다. 그랜트는 이런 이들을 겨냥해, 윈도95를 쓰는 사람들을 보고 웃으면서 그보다도 오래전에 형성되었던 자신의 견해는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