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과 사다리

입력
2021.05.07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엄마 미안해. 이제 다시 힘을 내 살아갈 자신이 없어…"

3년 전 코인 광풍이 사라지자 온라인 직장인 익명 게시판에는 처지를 비관하는 A씨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를 가고, 또 대기업 취업에도 성공했다. 5년 열심히 월급을 모아, 수억 원대 종잣돈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유망하다는 코인에 돈을 투자했을 때는 광풍이 정점에 다다랐던 '끝물'이었다. 투자금은 단 며칠 만에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A씨 글이 올라오자 동년배인 2030세대들의 응원 댓글이 줄을 이었다. '젊은데 그깟 돈 금방 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등 콧등이 찡해지는 따뜻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지난해 코인 광풍이 다시 불자, 글쓴이의 아픈 상처는 아주 오래전 일처럼 잊혔다. 게시판에는 '어떤 코인을 사야 돈복사가 잘되네', '이 코인을 사면 조기 은퇴할 수 있다' 등 '한탕주의'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가끔 2018년 기억을 꺼내며 코인의 위험성을 언급하는 글이 올라오면, 예외 없이 '틀딱(노인 비하 은어)'이라거나, '평생 그렇게 노예(직장인 비하 은어)로 살라'는 등의 공격적인 댓글이 곧장 달렸다.

코인 투자를 '잘못된 길'로 묘사한 은성수 금융위원장 역시 2030세대들의 주적으로 몰렸다. 정책 파트너인 여당에서도 '꼰대 발언' 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기성세대들은 부동산 투기로 자산을 불려놓고, 젊은 세대들의 마지막 계층 상승 사다리인 코인 투자를 막는다는 게 비판의 논리였다.

사실 2030세대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절박하다. 집과 일자리는 40대 이상 기성세대가 모두 차지하고 있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룻밤 새 몇 배가 뛰는 코인 투자에 그들이 집중하는 이유가 심정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가상화폐가 정말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코인 업계 말을 종합하면 지금 유통되고 있는 500여 개의 가상화폐 중 기술적 배경 등을 담은 발행백서가 엉터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의 코인 투자 열풍에 기대 한몫 잡아보려고 얼렁뚱땅 코인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사기꾼'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코인의 제도권 편입을 놓고 장고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그렇다고 또 아예 모른 체도 못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3년 전 "거래소를 폐쇄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면서 사실상 코인 투자를 막았는가. 그 엄포에 투자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정부는 이 문제를 사실상 방치했다. 현재 코인 거래소가 난립하고 2030 중심의 가상화폐 투자자가 500만 명을 넘어선 것은 이런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가 만든 현실이다.

정부가 "투자자 책임"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이 수많은 썩은 사다리들이 2030세대들을 유혹하고 있다. A씨 같은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정부가 지금이라도 최소한의 코인 옥석 가리기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들이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그 아픔과 충격은 그들에게만 미치지 않을 것이다.

민재용 정책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