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전성기의 기틀을 닦은 ‘영웅’일까, 아니면 유럽 정복 욕망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게 한 ‘독재자’일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사망한지 꼭 200년이 지났지만 그는 프랑스 사회에서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5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위치한 나폴레옹 묘역을 찾아 헌화했다.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 유배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눈을 감은 지 꼭 두 세기 만에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연소 지도자’로 불리는 마크롱 대통령이 추모한 것이다. 그의 행보는 나폴레옹 유산을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해묵은 논쟁에 불을 붙였다. 대통령이 직접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의 죽음을 기릴 필요가 있느냐는 게 논란의 핵심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란 명언은 도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자취를 두고는 평가가 분분하다.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15년간 유럽을 호령하며 정치,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평생 86번의 전쟁을 치르며 프랑스를 본토의 3배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는 유럽 군사 강국으로 키워냈다. 법전을 펴내 현대 프랑스의 법률적 토대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등 교육제도와 금융시스템 역시 그의 업적이다. 때문에 우파 진영에서는 그를 중앙집권적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국부(國父)로 추앙한다.
반면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전쟁으로 600만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폐지된 노예제를 8년만에 부활시킨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성(性)차별도 노골적이었다. 그가 만든 민법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런 점을 들어 그의 탄생과 죽음을 국가가 기념할 이유가 없다는 게 좌파 진영의 주장이다.
나폴레옹을 향한 조심스러운 평가는 지금도 사회 곳곳에 투영돼 있다. 광장ㆍ거리 이름에 명사 이름을 붙이는 데 거리낌 없는 파리에서도 ‘나폴레옹대로’나 ‘나폴레옹궁’은 없다. 카르티에라탱 지역에 넓지 않은 ‘보나파르트 거리’만 있을 정도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나폴레옹을 두고) 프랑스인들은 양가적 감정을 지녔다”고 해석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헌화를 두고 비판 목소리가 커지면서 엘리제궁은 일단 “일방적 찬양이나 저평가는 적절하지 않다”고 해명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마크롱이 프랑스 문화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섰다”며 “그의 선택은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이라고 평가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논쟁 한 복판에 뛰어들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