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4대강이라 부르는 큰 물줄기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여주 구간 남한강은 여강이고, 부여에서 금강은 백마강이다. 호남 일대를 두루 적시는 영산강은 나주의 영산조창(榮山漕倉)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길이(115㎞)는 섬진강에 미치지 못하지만 포괄하는 유역이 넓어 통상 4대강으로 분류한다. 담양 용추봉에서 발원해 목포 앞바다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이 강도 남포강·목포강·동강·곡강 등 다양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무안 지역 영산강은 몽탄강(夢灘江)으로 불린다. 한글로 풀어 쓰면 ‘꿈여울’이다.
몽탄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낮은 강 언덕에 식영정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잔잔하게 휘돌아가는 ‘꿈여울’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 잡았으니 꿈결 같은 풍광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명에 얽힌 유래는 다급하고 절박하다.
이야기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909년 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수군 2,5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봉쇄한 후 후백제 땅인 나주 공략에 나선다. 영산강을 거슬러 몽송마을(현 나주시 동강면)에 진을 쳤지만 견훤 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뒤에는 영산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어 물러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밤이 깊어 갑옷을 입은 채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기회라 일러준다. 무사히 강을 건넌 왕건의 군사는 인근 두대산 오갈재에 매복한 후 뒤쫓아오는 견훤의 군사를 물리쳤다. ‘몽탄’은 바로 왕건과 고려 건국의 꿈을 살린 ‘꿈여울’이다. 왕건이 견훤의 군사를 물리친 다리는 파군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몽송마을 역시 왕건이 잠시 몸을 기대고 꿈을 꾼 소나무가 있던 마을라는 뜻이다. 하류 일로읍의 주룡나루터도 왕건이 머물렀다는 전설을 지닌 곳이다.
밀물과 썰물 때면 서해의 바닷물이 영산강 깊숙한 지점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던 시절의 얘기다. 1981년 영암과 목포 사이 물목이 영산강하구둑으로 막힌 후부터는 강과 바다가 분리되었고, 이 부근 영산강도 항상 일정 수량을 유지하고 있다.
몽탄강변 식영정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강물이 삼면으로 크게 휘감은 맞은편 몽탄마을도 눈높이 정도로 편안하게 조망된다. 식영정은 나주 임씨 입향조인 임연(1589-1648)이 1630년 강학과 휴식을 위해 지은 정자로, 영산강 주변의 묵객들이 많이 찾은 곳이었다고 한다. 1900년대 초반에 고쳐 지은 자그마한 정자 주변으로 수령 500년이 넘는 팽나무와 푸조나무, 감나무가 감싸고 있어 푸른 강물과 함께 여유로운 풍취를 자랑한다. 주변 경관이 빼어난 것은 당연지사, 식영정 일대는 영산강 8경 중에서도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으로 불린다. ‘꿈여울에 울려 퍼지는 풀피리 소리’라는 뜻이다. 갈대와 억새가 무성했을 강변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노란 유채 물결이 살랑거린다.
식영정 처마에 걸린 ‘연비어약(鳶飛魚躍)’ 현판도 옛 정취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한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그들의 방식으로 생을 즐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실제 바다와 분리되기 전 영산강에는 온갖 물고기가 풍성했고, 덕분에 주민들도 내륙이지만 게와 숭어 등 바다생선을 맛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전남 담양에도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가사 문학의 대가 정철의 흔적이 배어 있는 유적으로 이름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완상하는 정자다. 이곳 몽탄면 식영정(息營亭)은 가운데 한자인 ‘영’자가 다르다. 쉬는 것은 같지만 무엇을 꾀하고 계획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내륙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저지한 방어선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호남평야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물길이었으니 ‘쉼’ 속에서도 나라 경영의 큰 뜻을 품을 만한 장소이기도 하다.
식영정에서 강변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석정포다. 몽강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나루터였는데, 지금은 쪽배 한 척 없는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세 개의 손가락으로 옹기를 떠받치고 있는 조형물이 눈에 띈다. 무안에서 생산된 옹기가 이곳에서 돛배에 실려 영산강을 따라 전국으로 팔려나간 역사를 알리는 상징물이다. 1960년대에 몽강리에만 90여 호의 주민들이 옹기 생산에 참여했고, 4개의 가마와 7곳의 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함평 나주 영광 등 인근에서 나는 도자기를 모두 ‘무안몰(무안 물건)’이라고 불렀어요.” 식영정 인근에서 ‘도예공방 아트몽’을 운영하고 있는 박정규 작가는 강진이 고려청자의 고향이라면 무안은 분청사기의 본거지라고 단언한다. 분청사기장의 뿌리 역시 고려청자다. 강진에서 관요(官窯ㆍ관에서 운영하는 가마 또는 도자기) 제작에 참여했던 도공들이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살길을 찾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무안에 정착한 도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흙이 좋고 가마에 땔 나무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영산강 뱃길이 든든한 교역로가 돼 주었기 때문이다.
생산 물품도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청자에서 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생활도기로 확대됐다. 여기에 도예가의 예술성까지 한껏 발휘돼 다양한 분청사기가 제작됐다. 분청사기는 회색에서 청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빛깔을 구사한다. 현재도 무안에는 전통 방식으로 자기를 굽는 도예 공방이 15개에 이르고, 현대식 설비를 갖춘 곳까지 포함하면 50~60개 업체가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몽탄면 소재지 인근 ‘분청사기 명장 전시관’에서 김옥수 명장을 비롯해 무안 도예공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강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왕건의 전설이 깃든 몽송마을뿐만 아니라, 몽탄면의 느러지마을 역시 강물이 360도 가까이 휘어지며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름처럼 낮은 산줄기가 강으로 길쭉하게 늘어진 지형으로, 공중에서 보면 한반도 지도와 모양이 비슷하다. 당연히 강 건너편에서 봐야 윤곽이 잡힌다.
몽송마을 뒷산에 3층 규모의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한반도 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산 자체가 낮아 뚜렷하지는 않다. 그래도 휘어진 강은 바다처럼 품이 넓고 그에 안긴 강변마을에서 남해의 지형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다. 인근 비룡산 정상에 오르면 느러지마을 풍광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전망대라는 명칭은 없지만 산책로가 잘 닦여 있고, 정상에 쉼터 겸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한반도 지형보다 'S' 자로 휘어져 장대하게 흐르는 영산강의 풍광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느러지마을엔 최부(1454~1504)의 묘소가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표해록’을 지은 인물이다. 성종 19년(1488)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됐다가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인 나주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해 온갖 고난을 겪고 반 년 만에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왕명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그의 묘는 먼저 자리 잡은 부친의 묘 바로 아래에 조그마하게 조성됐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성종의 지시로 나라의 지관이 정한 명당이라 전해진다.
묘소 앞 사당 담장에는 중국 저장성 닝보에 표류해 항저우, 쑤저우, 베이징, 요동지방,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귀환하기까지 약 6개월간 최부의 이동 경로가 민화처럼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윤곽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흔한 골목 벽화처럼 가볍고 색까지 바랬다. 흔치 않은 중국견문록과 저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듯해 조금은 안타깝다.
느러지전망대 입구에도 최부의 사연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의 고향이 바로 나주 동강면인 까닭이다. 나주에서는 영산강을 동강 또는 곡강이라 표현하고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풍경이 되는 지형, 도도한 물결 앞에서 인위적인 행정 구분이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몽탄면 상류 함평천이 영산강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느러지마을을 거쳐 일로읍까지 강변도로가 깔끔하게 조성돼 있다.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여서 통행량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드라이브를 즐기기 좋은 길이다. 일로읍에는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라 자랑하는 ‘회산백련지’가 있다. 이제 막 초록 연잎이 물위에 떠올라 푸르름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더위 속에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는 6~8월이 제철이지만 호수 위 산책로를 걷기에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요즘이 오히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