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22일 오후 9시 14분. 끝나가는 주말을 아쉬워하며 TV를 시청하던 미국 시카고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역 채널 WGN방송 뉴스를 통해 미국프로풋볼(NFL) 홈팀의 승리 소식을 보고 있던 중 화면이 끊기더니 별안간 우스꽝스러운 고무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이 방송됐다. 화면에 나온 고무 가면은 1985년 영국에서 선보인 가상 인공지능(AI) 캐릭터 ‘맥스 헤드룸’이었다.
방송은 곧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뉴스를 진행하던 댄 로언 앵커조차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궁금하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시간 뒤엔 인근 WTTW방송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반복됐다. 맥스 헤드룸 가면을 착용한 인물은 드라마 재방송 도중 또 화면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음성도 곁들여졌다. “내가 지금 세계 제일의 신문 얼간이들을 위해 엄청난 걸작을 만들었군”과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곧 화면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방송을 총괄하는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에서 공중파 방송 전파가 납치당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아직 꺾이지 않았을 때라 소련의 소행이 아니냐는 의혹이 솔솔 불거졌다. 실제로 사건 20여 년 전인 1966년에는 소련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시의 라디오 방송이 해킹돼 “미국과 핵전쟁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또 1985년 9월에는 당시 공산진영에 속했던 폴란드 국영방송에서 전파해킹 사태가 터져 TV 화면에 ‘거짓말과 억압’ 등 반(反)체제 메시지가 송출된 적이 있다. 국가 안보 위기를 걱정하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FCC가 직접 나섰다. 필 브래드퍼드 FCC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며 “FCC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조했다. 범인이 잡히면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과 징역 1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았다.
FCC의 고강도 대응은 바로 직전인 1986년 4월 일어났던 유료 케이블 채널 HBO 전파납치 사건 때와는 수위가 확연히 달랐다. 이른바 ‘캡틴 미드나이트’ 사건이라 불린 HBO 해킹은 케이블TV 요금에 추가 요금을 부과한다는 방침에 반발한, 동기가 분명한 범죄였다. 새벽 시간대에 발생해 목격자도 소수였다. 위성신호를 해킹하는 수법을 써 용의자 역시 특정 기기에 접근 가능한 이들로 좁혀졌고, 사건 며칠 뒤 범인이 붙잡혔다.
경고는 셌지만 수사에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초동수사까지 부실해 용의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앤더스 요컴 WTTW 대변인은 “사건이 일어난 시간 시어스타워(현 윌리스타워) 송신소에 근무하던 엔지니어는 없었다”며 “방송국에서 전송 상태를 점검하는 직원들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식 조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범행이 끝난 뒤였다”고 털어놨다.
FCC 측은 먼저 방송 송출에 관여하는 워싱턴ㆍ시카고 사무소를 압수수색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러자 미 연방수사국(FBI)까지 수사를 거들었다. FBI는 유일한 증거인 전파납치 녹화 방송분에 집중했다. 하지만 등장 인물이 가면을 써 얼굴을 식별하기가 불가능했다. 대신 FBI는 녹화 영상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마이클 마커스 FCC 조사관은 “배경은 2.4m 너비의 산업용 금속으로 보이며 금속제 셔터 문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형 창고가 영상 녹화 장소로 지목됐다. 수사당국은 즉각 시카고와 인근 지역의 창고들을 훑었지만,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결정적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카고가 미 중서부 지역의 경제 중심지라 창고는 너무 많았고, 수사 인력도 절대 부족했다.
그 다음 시나리오로는 내부 소행 가능성이 대두됐다. 첫 방송 사고 대상이었던 WGN 방송국에서 비슷한 시기 정리해고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근거가 됐다. 방송 전파를 납치할 정도면 상당한 연관 기술을 갖춰야 해 해고자나 회사에 불만을 품은 직원이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범인이 말한 “세계 최고의 신문 얼간이”라는 언급도 WGN 비판 세력이 범행을 주도했을 것이란 추측에 힘을 보탰다. WGN의 사명이 모기업인 시카고 지역 일간 시카고트리뷴의 캐치프레이즈였던 ‘World Greatest Newspaper(세계 최고의 신문)’의 약어였던 탓이다. 납치 영상 중에 또 다른 단서도 있었다. 전파납치범은 영상에서 “내가 척 스워스키보다 나은 것 같군. XX 같은 빨갱이”라고 떠들었는데, 스워스키는 WGN 스포츠 해설자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FCC는 이 같은 가설을 일축했다.
수사는 제자리걸음을 맴돌다 그대로 중단됐다. 방송국 자체 조사에서도 내부자가 연루됐다는 정황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WGNㆍWTTW가 각각 전파를 송출하던 존 행콕 센터와 당시 세계 최고 높이 마천루였던 시어스타워의 송신소를 방해하려면 엄청난 출력을 가진 장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전부였다.
그래서 사건 발생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호사가들은 전직 직원의 자작극으로 확신하고 있다. 장비 사용 기술과 증거 인멸 방법까지 모두 꿰고 있는 사람은 방송국 관계자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WGN 방송 엔지니어로 일했던 로버트 스트루첼은 2019년 미 공영방송 NPR 인터뷰에서 “방송 신호를 방해하기 위해선 더 강한 전파를 발신해야 한다”면서 전문가 소행임을 단언했다
여전히 성별과 나이 등 법인의 윤곽은 오리무중이다. 설령 전파납치범을 체포하더라도 처벌할 길 역시 없다. 미 연방법은 전파납치 공소시효를 최대 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리해고에 저항하려던 방송국 내부인이 저지른 계획 범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방구석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던 어느 장난기 가득한 천재의 일탈일지도 모른다.
다만 무고한 시민 다수가 숨진 강력 장기미제 사건과 달리 인명 피해가 없었던 만큼 미국사회는 이제 전파납치 사고를 유쾌한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WGN 측은 사건 30주년을 맞은 2017년 11월 22일 “맥스 헤드룸 전파납치 미스터리는 해결되지 않았다”면서도 “엄청난 방송 사고였지만 기발한 발상이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재미도 줬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역대 WGN 9시 뉴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개그’”로 사건을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