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가 Y를 찾았다며 함께 고향에 다녀오잔다. 몇 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한 친구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그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해당관청에 문의했고 담당자가 어렵사리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얘기였다. "점심 약속했다. 많이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가자."
Y를 만나는 것은 6~7년 만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Y는 2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걸음과 말에 힘이 없고 손을 떨고 눈에는 황달기가 역력했다. 60대 초반에 숫제 90대 아버지를 모시고 온 기분이 아닌가. "병이 네 가지래. 인후에 혹이 있고 비염에 우울증 증세도 심하다네." Y는 무슨 대수냐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동창회는 왜 발길을 끊었는지 묻자 돈이 없으니 그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딸한테도 연락 안 해. 아비라고 도와줄 형편도 못 되는데 소식 들어봐야 가슴만 아프지 않겠어?" 그 말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한 가족은 상처가 될 뿐이다.
C가 고집을 부려 우리는 Y의 숙소까지 찾아갔다. 역 근처의 원룸. 한 평 남짓에 침대 하나, 좁은 생활공간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은 없었다. "다섯 군데를 옮겼는데 여기가 제일 헐해." 방세는 한 달에 20만 원, 기초수급비로 30만 원쯤 받는데 10만 원이나 남는다며 허허 웃는다. "밥도 주는 걸. 반찬은 김치뿐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Y는 3개월째 거의 밥을 먹지 않았다. "하루 종일 누워 지내. 막걸리 사다놓고 마시다가 잠들고 깨면 또 마시고." 식당까지 갈 의욕도 없고 밥알을 넘길 자신도 없단다. "오래 살아서 뭐 하겠어? 뭐가 나아진다고?" C가 비싼 오리고기를 사주었건만 Y는 몇 점 집는 시늉만 하고 오리탕 국물에 소주잔만 기울였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3년 비정규 중학교에서였다. 박정희 정권이 빈민아이들의 비행을 줄이겠다며 전국에 설립한, 이른바 이름만 교육기관이다. 대부분 교육보다 사회격리에 방점을 둔 터라 공부는 뒷전이고 욕설과 매질이 먼저였다. 우리 학교는 그나마 강도 높게 검정고시 준비를 시켰는데 어쩌면 그 때문에라도 폭력은 더 심했을 법하다. 자존감이 바닥인 기지촌 아이들에서도 최악의 집합인 셈이다. 그 폭력이 무서워, 어쩌면 그 덕분에 C와 나같이 운 좋게 탈출한 아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 무지막지한 가난과 폭력에 짓눌린 채 아무 희망 없이 삶을 버텨내야 했을 것이다. 몇 해 전 M이 세상을 떠났을 때 친구들과 되짚어 보니 당시 60여 명의 남학생 중 세상을 떠난 이가 스물댓 명이나 되었다. 그 작은 표본에서 너무 가혹한 사망률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질환과 자살... 가장 많은 원인이 알코올중독이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그동안 어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가난은 창피한 게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 했던가? 아니, 가난은 치욕이자 저주이며 죄악이다. 가족도 사회도 차마 외면해야 할 치욕이자 모든 의욕과 희망을 앗아가는 저주이며 오로지 죽음으로 속죄해야 할 죄악이다. 돌아오는 길, C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또 머지않아 오랜 벗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
무심코 열어 본 핸드폰 메인에 뜬 뉴스들. "국민 10명 중 7명, 이재용 사면 원해", "고소영 청담동 집, 163억 원"... 세상 참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