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특허 유예 논란

입력
2021.04.2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코로나19의 대유행 초반기인 작년 5월, 세계보건총회는 백신 특허공유 결의안을 채택했다. 백신 임상시험이 막바지이던 10월에는 인도와 남아공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지식재산권협정(TRIPS)의 일시 유예를 청원했다. 당시 백신과 치료제 등 코로나 관련 지식재산권의 보호막을 풀자는 요구는 백신 민족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주요국들은 오히려 막대한 자금으로 백신을 입도선매, 빈국의 백신 접근성을 요원하게 만들었다. 백신은 현재 빈국에 겨우 1%만 돌아가, 이런 추세라면 2, 3년 뒤에야 전 세계 백신접종이 끝날 수 있다.

□ 침묵하던 국제사회가 최악으로 치닫는 인도의 코로나 사태로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백신 특허 공유는 거창한 인류애나 양심을 거론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이익인 경제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백신 개발을 주도한 거대 제약사인 빅파마들의 반대는 집요하다. 온라인매체 인터셉트는 올 1분기에 빅파마들이 바이든 미국 정부 관료와 의회에 특허유예 반대를 위해 100명 이상의 로비스트를 고용했다고 전했다. 미 상공회의소, 국제지식재산권연맹(IIPA) 등도 빅파마 돈을 받고 반대 로비를 벌였다.

□ 로비 때문인지 특허 유예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백악관도 특허 유예를 검토 중이란 입장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빅파마들은 특허 유예가 백신 부족의 해법이 아니라면서도 왜 반대하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번 백신은 바이러스 변형, 유전자 기술이 동원돼 특허를 푼다고 바로 제조할 수는 없다. 호주의 경우 화이자 백신을 생산하는데 최소 1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충분한 기술 지원만 있다면 다수 국가에서 신속한 백신 생산이 가능하다.

□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화이자, 모더나는 내년 백신 생산량을 각기 30억 회분으로 예정보다 두 배 늘리겠다고 밝혔다. 더 이상 공방을 피하려는 것이지만, 빌 게이츠가 후원하는 국제 백신 공동구매 프로젝트인 코백스는 20억 회분 공급이 목표다. 특허가 유지되면 빈국은 미국, 유럽의 자선에 상당량 백신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가져온 폭력 중 하나는 빈곤 국가가 코로나의 먹이가 되는 현실이고, 더 큰 해악은 가려져 있던 진실들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