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차산업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세상은 바뀌지만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었다. 왜냐하면 3차산업까지는 결과가 도출된 뒤에 정의가 존재한 것이라면, 4차산업은 미래에 대한 변화 예측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의 쓰나미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인터넷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박살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4차산업은 코로나 버프를 받으며 오늘도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5G를 넘어 6G가 위성망을 통해 갖춰지면, 1초에 1테라를 전송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그것도 이것이 미래의 머나먼 지평선이 아닌 불과 몇 년 뒤의 현실로 말이다. 4차산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더니, 급기야 가상이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물물교환에서, 화폐가 발생하게 되면 현물은 상징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은행이 만들어지면 화폐는 숫자로 대체되고, 이제는 신박한 아이디어가 이런 숫자를 넘어서는 의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현실 묘사에 치중했던 미술이, 사진이 발명되자 모든 시각적 형상을 해체하고 추상으로 나간 것과 유사하다. 즉 형상이 아닌 본질에 대한 환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4차산업을 넘어 5차, 6차산업이 전개되어도, 삶의 목적은 행복을 조준한다. 문명은 삶에 편리함을 부여하지만, 이는 행복에 포함될 뿐 행복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명상과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붓다는 태자로 태어났다. 시쳇말로 금수저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왕위계승 수업 과정에서, 돌연 출가를 단행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충분히 가졌던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물질의 한계에 대한 통찰 때문이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의 재산이 200조 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실로 어마무시한 자산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면, 재산은 무의미한 숫자로 회색화되기 때문이다. 200조가 1,000조가 된들 그의 삶에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이런 본질적 문제로 인해 전통적인 부호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은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한다는 발표를 한 것이리라.
우리가 출가라고 표현하는 것을 서양에서는 ‘위대한 포기’로 번역한다. 진정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는 참가치에 대한 추구, 이것이 바로 붓다의 출가 정신에 녹아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붓다는 삶과 죽음을 관통할 수 있는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즉 현재에서의 행복도 필수라는 것이다.
삶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사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은행의 적금 같은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행복의 추구에 있어서만은 그 어떤 종교보다도 이기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것이 나의 행복을 넘어 우리 모두의, 그리고 동물이나 모든 생명에게 두루 미칠 수 있는 행복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금수저를 포기한 이유이다.
물질문명이 발전할수록 빈부 차와 양극화에 따른 갈등은 심각해진다. 이를 극복하는 측면이 바로 현실적인 노력과 내면의 조절이다. 또 내면의 평안이야말로 외부의 거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잠시 눈을 감고 붓다의 명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