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은 바위가 낙동강 제1경? 달빛에 시가 흐르는 섬도 있다

입력
2021.04.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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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상주 사벌국면 경천대와 경천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늘 똑같아 보이는 풍광도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바뀌고, 시간이 축적되면 몰라보게 변해 있다는 의미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기준은 더 빠르게 변한다. 경관도 바뀌고 명소도 달라진다. 상주 낙동강의 전통적인 관광지 경천대와 요즘 뜨는 경천섬도 그런 경우다.


마음으로 보는 관광지, 은둔자의 휴식처 경천대

사벌국면은 낙동강이 상주 땅에 처음 닿는 곳이다. 그전까지 사벌면이었다가 지난해 ‘나라 국(國)’ 자를 더했다. 지역의 역사를 좀 더 분명히 하자는 의도다. 사벌국은 삼한시대에 상주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다. 병풍산 기슭에 당시 중심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고, 신라 54대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로 사벌국을 다스린 어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전사벌왕릉)도 있다.

흔히 낙동강 1,300리라고 한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해 부산 을숙도 부근에서 남해로 흘러드는 약 510㎞ 물길이다. 사벌국면 퇴강리 강변에는 ‘낙동강 칠백리 이곳에서 시작되다’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리를 해서라도 최고, 최장, 최대를 자랑으로 삼는 세태에 절반을 뚝 떼어냈으니 의아하다. 수많은 산줄기를 돌고, 무수한 물길이 합류하며 점점 넓어진 낙동강이 이곳에서 비로소 강다운 면모를 갖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700리는 이곳부터 부산까지의 낙동강 길이이다. 낙동강이라는 명칭이 상주의 옛 지명인 상락(上洛)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니 또 다른 기점이라는 주장이다.


경천대는 낙동강에 대한 상주의 자부심이 축약된 곳이다. 하늘이 만든 절경이라 해서 자천대(自天臺)라고도 부르고, ‘낙동강 제1경’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화려한 말잔치만 듣고 가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장쾌한 풍광이 펼쳐지는 멋들어진 누각이 아니다. 그저 강가의 조그만 바위 언덕에 불과한 옛날 전망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낮은 언덕을 넘으면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 강물이 스친다. 제법 울창한 노송 숲을 통과하면 자그마한 정자가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 인조ㆍ효종 때의 학자(1605~1646) 우담 채득기가 처음 세운 무우정(舞雩亭)이다. 춤을 추며 비를 기원한다는 의미인데 논어 ‘선진’ 편에서 따온 표현이다. 공자가 제자 증점에게 장래 포부를 묻자 “늦봄에 봄 옷이 이루어지면 관동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출세의 길을 버리고 자연과 벗하겠다는 포부다. 실제 우담은 병자호란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맞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호위하고 선양(심양)까지 동행한 인물이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효종의 관직 제의를 마다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시문에 매진했다고 한다.



무우정 뒤에 그가 남긴 가사 ‘봉산곡’을 새긴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노라 옥주봉아 있거라 경천대야’로 시작하는 102구의 시는 왕명을 받고 감격해 장도에 오르는 선비의 각오를 밝히고 있다.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이길 길 없어 속세를 떠나 안빈낙도하는 심경, 은둔지의 경치를 찬미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상도 읊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가사로는 그 내용과 작자가 분명한 작품이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경천대는 어디 있을까? 무우정보다 멋진 건물만 생각했으니 눈앞에 두고도 보이지 않는다. 정자 바로 옆의 조그마한 바위 언덕이 바로 경천대다. 한눈에 감탄을 자아내기엔 턱없이 작아 실망스럽다. 발밑으로는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맞은편에는 강물이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형성한 회상리 들판이다. 경치가 특별히 뛰어나다고 하기 힘든 평범한 강 풍경이다. 일상의 평화로움을 마음에 담는 곳이다. 그나마 바위 사이에 선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자세히 보면 모래와 자갈이 진흙과 굳어진 역암의 섬세함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소박하지만, 400여 년 전 은둔자가 보고 느낀 풍경은 달랐을 듯하다. 경천대의 위치는 바깥에서는 존재를 알기 어려운 외진 곳이다. 지금은 하류의 상주보에 갇힌 강물이 강폭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당시에는 물굽이마다 은빛 모래사장이 반짝거렸을 것이다. 외지인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으니 자연과 벗하는 선비의 은둔지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서글픈 흔적도 남아 있다. 바위 사이에 작은 비석이 숨겨 놓은 듯 세워져 있다. ‘경천대(擎天臺)’라는 글씨 아래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고 쓴 문구가 선명하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고 대명천지는 명나라가 중심이 된 세상을 의미한다. 속된 말로 뼛속까지 사대주의에 찌든 표현이다. 떠오르는 청나라에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랑이 이토록 지독했으니 경천대라는 이름이 조금은 허망하다.



오래된 관광지인 만큼 경천대 주변에는 다양한 볼거리를 끌어다 놓았다. 뒷산 봉우리에 팔각정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고, 하류 물가에는 20년이 지난 드라마 ‘상도’ 촬영 세트도 있다. 계곡을 연결하는 산책로에는 나무다리와 출렁다리도 설치했고, 정확한 의미를 알기 힘든 조각공원까지 갖췄다. 1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다.

달빛에 시가 흐르던 경천섬, 상주 낙동강 명소로

경천대가 상주의 역사를 간직한 옛날 관광지라면 약 2.5㎞ 하류의 경천섬은 현대적으로 단장한 요즘 뜨는 관광지다. 상주보 상류에 위치한 약 20만㎡의 작은 하중도(河中島)로 강 양편에서 다리를 연결해 놓아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섬으로 들어가기 전, 강 서쪽에 도남서원이 있다. 조선 선조 39년(1606)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중앙의 정허루에 오르면 맞은편에 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경천섬이 강물과 비슷한 높이로 찰랑거린다.


서원 앞 강변에 ‘낙강범월시(洛江泛月時)’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낙동강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상주 문인들이 이어온 낙강시회의 창작 작품을 모은 시를 일컫는다. 낙강시회는 고려 명종 26년(1196) '최충헌의 난' 때 상주로 피신한 이규보의 시회를 시작으로, 조선 성종 22년(1491) 상주목사 강구손, 의성군수 유호인 등의 시회를 거쳐 철종 13년(1862)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진 유서 깊은 시회다. 강물에 달 띄우고, 뱃놀이를 겸한 시 모임을 열었으니 그 멋과 풍류를 어디에 빗댈까. 유래비는 맥락 없이 커다란데 시 한 수 새기지 않았으니 조금은 허탈하다.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따라 아기자기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지금은 분홍빛 꽃잔디와 노란 유채가 색감을 더하고 있다. 길이 약 1km, 폭 350m가량의 섬은 산책하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다. 소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놓여 있고, 잔디밭도 곳곳에 조성해 놓아 호젓하게 소풍을 즐기기 그만이다.







반대편 교량을 이용해 강 동쪽으로 넘어가면 옛 회상나루터다. 배는 보이지 않고 끝없는 수상 산책로가 이어진다. 약 1km 길이 뜬 다리 산책로로 시원하게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비봉산 중턱에는 현대식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두루미를 형상화한 학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경천섬이 길쭉하게 펼쳐지고, 장대하게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파노라마로 연결된다.

풍광이 시원하기는 큰돈 들인 전망대보다 왼편 산자락의 청룡사가 오히려 낫다. 절간 뒤로 연결된 산악자전거도로로 조금만 가면 경천섬이 공중에서 내려다보인다. 나비 문양을 중심으로 연결된 산책로의 윤곽이 뚜렷하고, 섬 앞뒤로 흐르는 물줄기도 아찔하다. 옛 문인들은 달 뜨는 풍광을 즐기며 시를 읊었다는데, 이곳에서는 해 질 녘 노을이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사진이 먼저인 요즘 여행에 딱 어울리는 곳이다.




상주=글ㆍ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