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벽'마저 무너뜨려... "삼성 엘지 제품이 진열장 앞에 놓인 것과 같은 쾌거"

입력
2021.04.26 18:28
2면
이병헌 "불가능은 사실 아닌 의견일 뿐"

“지난해 ‘기생충’의 주요 상 수상에 이어 한국 배우가 최초로 주요 부문을 수상했다는 것은 이제 한국 영화, 한국 영화인이 변방이 아닌, 할리우드 주류에 편입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신과 함께’ 시리즈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처스 대표)

지난해 ‘기생충’은 오스카 4관왕(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에 오르며 세계 영화 역사를 새로 썼다. 세계를 놀라게 하고, 전 국민을 흥분케 한 사건이지만, 1%가량이 아쉬웠다. 배우들의 호연에 대한 성과는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은 ‘기생충’이 남녀주연상, 남녀조연상 어디에도 후보조차 오르지 못한 점을 오스카의 한계로 지적하기도 했다. ‘기생충’이 1인치 장벽을 무너뜨렸다고는 하나 장벽 중 일부는 굳건히 남아 있었다.

아시아인에게 유난히 높고 두껍던 나머지 장벽마저 25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무너졌다. 배우 윤여정(74)이 제93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다. ‘기생충’이 비영어 영화로는 최초로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이후 불과 1년여 만이다. 윤여정의 수상은 ‘기생충’과 다른 의미를 한국 영화계에 던졌다.

산업적 의미부터가 남다르다. K팝과 K드라마, K무비가 환대 받는 가운데 K배우까지 세계 시장에서 각광 받게 됐다. 원동연 대표는 “아시아에서만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 받던 K콘텐츠가 세계에서 영향력을 갖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 대표는 “20년 전 미국 대형 가전 마트 구석에 놓여 미국인이 싼 맛에 사던 삼성, 엘지 제품이 단독 부스를 차지하고 맨 앞에 진열된 것처럼 이번 수상은 영화를 비롯한 한국 콘텐츠 전반이 세계 중심으로 진입한 걸 확인한 쾌거”라고도 주장했다.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어 이뤄낸 성취는 영화인에게 큰 힘을 줄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노배우가 오스카 수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시켜 준다”며 의미부여를 했다. 김효정(수원대 영화영상학부 객원교수) 영화평론가는 “일흔이 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것은 메릴 스트립 정도를 제외하면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며 “한국 영화인을 넘어 전 세계 여성 영화인들에게 큰 영감을 줄 성과”라고 평가했다.


후배 배우들에게는 의욕을 고취시킬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2018)에서 윤여정과 연기 호흡을 맞춘 이병헌은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며 “윤여정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브라보!”라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배우 이승기는 “한국 배우들에게도 너무나 큰 영광으로 큰 획을 그어주신 것 같다”며 “아카데미라고 하면 막연히 외국 배우들을 위한 시상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국 배우가, 그것도 가까운 윤여정 선생님이 그 무대에서 수상하시게 되어 너무 설레고 기쁘다”고 밝혔다. ‘기생충’에 출연했던 배우 최우식은 “모두가 가장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이었는데, (방송을) 보면서 울컥했다”고 말했다.

1966년 데뷔 후 꾸준히 연기를 해 오며 오스카 트로피까지 안은 윤여정의 배우 인생은 그 자체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윤여정은 한국 영화계에서 미나리처럼 끈질기게 연기를 해온 배우”라며 “큰 영화, 작은 영화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역할이라면 기꺼이 출연을 해왔기에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영예까지 안았다”고 평가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