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21일 ‘각하’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들의 청구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사실상 원고패소 판결이다. 국제관습법과 외교적 충돌 가능성 등의 관점에 비춰, ‘한국 법원이 주권 국가인 일본의 행위에 대해 재판권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취지다. 지난 1월 초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던 1차 소송과는 정반대 판결이어서 또 다른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부장 민성철)는 이날 이용수 할머니, 고(故) 곽예남ㆍ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란 적법한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아예 본안 심리를 거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한마디로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재판부는 우선 “현 시점에서 ‘영토 내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국제관습법이 변경됐다고 볼 수 없다”고 전제했다. 주권면제란 ‘한 국가의 행위에 대해 다른 나라가 자국 법원에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을 의미한다. 재판부는 ‘주권면제의 예외’를 허용한 극히 일부의 국제조약은 아직 발효도 안 된 상태이며, 해당 조약을 비준하거나 개별 국내 입법을 한 국가도 유엔 회원국의 19%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주권면제를 부정하는 판단은 국제질서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판결 확정 이후 (배상금 등에 대한) 강제집행 과정에서 상대국인 피고(일본)와의 외교관계에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일제 위안부 동원은 주권면제 원칙이 엄격히 적용돼야 할 ‘주권적 행위’라는 것이다.
법원은 또,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도 국가 간 합의로서 효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최종 합의안에 관해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등 일부 문제점이 있지만, 일본 정부 차원의 권리구제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해 회복 등 위안부 문제 해결은 피고(일본)와의 외교적 교섭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대내외적 노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낸 일본 정부 상대 1차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 승소 판결과는 완전히 결론이 엇갈려 향후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당시 부장 김정곤)는 올해 1월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제국에 의해 계획적ㆍ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라며 주권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일본 정부가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확정됐다. 다만 재판부 구성원이 바뀐 민사합의34부(부장 김양호)는 지난달 29일 1차 소송비용의 강제집행을 위해 국내 일본 정부 자산을 압류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놨다.
이날 선고 후 이용수 할머니는 “너무 황당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꼭 가겠다”며 울분을 토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도 “인권의 최후 보루인 법원이 국제질서, 국익만을 위한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피해자 측이 항소할 가능성이 큰 만큼, 최대 쟁점인 ‘주권면제 적용 여부’는 항소심, 나아가 대법원에서 최종 결론이 내려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