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온 헐크 "한국 보는 듯… 베트남 야구, 근성·집중력 놀랍다"

입력
2021.04.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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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베트남 야구 도전기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 야구인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현재 야구 실력은 한국의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보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1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만난 한국 야구의 전설 ‘헐크’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의 평가는 냉정했다. 무시나 편견이 아니었다. 초대 베트남 야구협회의 기술고문으로 위촉된 그가 2주 격리 기간 동안 숙소에서 현지 야구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의 전력 분석 리포트를 읽고 또 읽은 뒤 내린 결론이었다. 2014년부터 오롯이 7년을 베트남의 이웃나라이자 비슷한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한 그다. 한낮이면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그늘 하나 없는 연습장, 야구에 대한 무관심. 누구보다 동남아시아의 특성과 열악한 야구 환경에 익숙한 이 전 감독은 섣부른 기대보다 더 필요한 건 따뜻한 인내의 시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근성과 집중력이 라오스와 아예 다르다. 베트남 야구는 분명히 금방 나아질 것이다.”

사흘 뒤인 18일 빌린 축구 경기장 한편에서 진행된 하노이 야구대표팀과 한국 사회인 야구단 간의 연습 경기. 보고 나니 달랐다. 이 전 감독은 자기 판단을 곧장 수정했다. 같은 동남아지만 기질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희생 번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린 라오스와 달리 베트남 선수들은 이미 야구의 기본인 팀워크와 협동의 필요성을 체득하고 있었다. 기술적 완성도 역시 보고서 평가보다 나았다. 무엇보다 한국 선수들처럼 지지 않으려는 근성으로 승부처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국가의 야구 발전은 기술 수준이 아니라 야구를 향한 열정과 부지런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믿는 그에게 베트남의 발전 가능성은 분명했다.

희망을 발견한 이 전 감독의 마음은 한결 가볍다. 이제 발걸음이 분주할 일만 남았다. 21일 베트남 야구협회에 따르면 당장 그는 내달 남부 호찌민과 중부 다낭을 직접 찾아 지방 야구팀 경기를 관전하고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의 면면을 직접 확인할 계획이다. 출장에는 베트남 정부와 한국 야구계를 연결해 준 이장형 베트남 야구협회 운영지원 고문과 유재호 전 라오스 국가대표팀 코치 등이 동행한다.

협회에 외국인 간부는 이 전 감독과 이 고문 둘뿐이다. 이 고문은 2018년 라오스에 찾아와 베트남에도 한국 야구를 전파해 줄 것을 이 전 감독에게 부탁했던 인물(2020년 10월 15일자 16면)이기도 하다. 베트남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의 물망에 오른 유 전 코치는 이 고문과 함께 1년 넘게 무보수로 베트남에서 한국 야구를 전파 중인 야구인이다. 앞으로 이 고문과 유 전 코치가 베트남 선수들의 성장기와 특장점을 알려주면 이 전 감독이 가능성과 야구에 대한 태도를 보고 국가대표로 발탁할지 여부를 조언하게 된다. 이들은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의 한국 연수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韓-베트남 모두 기원하는 K야구 성공

10일 공식 출범한 베트남 야구협회에도 한국은 각별하다. 초대 협회장에 선출된 딴득판 현 베트남 스포츠총국장이 취임사에서 “물심양면으로 베트남 야구 발전에 힘써 준 한국에 거듭 감사 드린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한국 역시 베트남을 향한 야구 지원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주(駐)베트남 한국 대사관과 한국문화원은 내달 15~16일 하노이에서 ‘2021 한국대사배 국제 유소년 야구대회’를 열어 현지 야구 붐을 일으킨다는 계획이다. 9월에는 성인팀을 대상으로 ‘한국-베트남 야구 챔피언십’도 진행한다. 대회뿐 아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제작 중인 베트남어 야구 교본은 올 상반기에 보급되고, 현지 한국 유튜버가 만든 야구 홍보 동영상도 조만간 베트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축구에 이어 야구에서도 제2의 ‘박항서 신드롬’이 일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국ㆍ베트남 상부상조의 동력이 됐다. ‘쌀딩크’, ‘베트남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박항서 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이미 개척한 길이 있기에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리 측면에서도 한국은 양국 관계에 야구라는 새로운 우호의 다리를 놓을 수 있고, 베트남에는 선진 스포츠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회다.

먼저 길을 튼 박 감독도 ‘K스포츠 한류’의 새로운 축으로 야구가 현지에서 자리 잡기를 기원하고 있다. 한양대 운동부 1년 후배인 이 전 감독과 18일 하노이에서 만나 진출 경험담을 공유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다.

돌이켜보면, 박 감독도 2017년 베트남 땅을 밟았을 때부터 지금의 대성공을 예상한 건 아니다. 4년이 흐른 지금, 이 전 감독도 마찬가지다. 담담하다. “야구는 축구와 또 다르다. 일단 베트남이 한국식 야구를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성공은 그 이후에 생각할 부분이다.” 스포츠에 100% 확률의 승패는 없다. 베트남의 한국 야구는 이제 1회초 첫 타석에 섰을 뿐이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