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날려야 된다.”
한 국립교대 2018년 입시에 응시한 장애학생에 대해 당시 입학팀장이 입학사정관에게 했다는 말이다. 팀장이 이렇게 말한 후 이 학생의 점수는 900점대에서 700점대로 깎여 탈락했다.
장애교원 채용은 이미 저조하다. 교육공무원 장애인 고용률은 1%대다. 법정의무고용률인 3.4%보다도 훨씬 낮다. 이번 교대 사태에 장애교사들은 분노했다. 이미 장애교사들은 교사 임용 면접부터 불이익을 받는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뇌병변 학생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임용시험에서 탈락됐다가 법정 소송을 한 사례도 있다. 은근한 차별이 교육 현장에 만연해 있지만 ‘설마 대입시를 건드리지는 않겠지’라고 장애교사들은 생각했단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믿음이 이번 사태로 깨졌다. 그 교대 입학팀장이 한 말로 다시 돌아가 보자. “너 2급 장애인이 네 아이 선생이라고 생각해봐라. 제대로 되겠나? 학부모 상담도, 학급 관리도 안 되지.”
학부모 상담이 왜 안 되나? 내 아이 학교의 농인 특수교사는 문자와 이메일로 학부모 상담을 한다. 청인의 말을 문자통역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더 원활히 소통할 수 있다. 휠체어 타는 교사가 왜 학급 관리가 안 되나? 그 교사가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갖추는 게 먼저 아닌가? 무엇보다 ‘장애교사는 열등하다’는 의식이 아예 편의증진 의지를 떨어뜨린 것 아니었을까?
몇 해 전 장애인 IT-스타트업 취업박람회를 열기 위해 장애당사자인 모 교수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장애 IT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과학고에 장애학생 전형을 힘들여 만들어놨는데 지원 학생이 거의 없었다는 거다. 얼마 전 모 유명 과학고 앞을 지났다. 언덕 위에 자리해서 접근성이 떨어졌다. 입시학원 상당수가 계단을 올라야 엘리베이터를 이용 가능한 건물에 있다. 과학고나 휠체어 접근성은 한 예시에 불과하다. 지난해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 상황에서 장애학생, 장애교사들에게 필요한 시스템이나 기기는 제대로 제공되지 못했다. 장애교사들이 소통 가능한 기본적 인프라가 없으면, “역시나 장애교사라서…”라는 인상을 학부모가 받을 수밖에 없고 ‘장애인은 열등하다’는 학교 현장의 통념은 더욱 악화된다.
영어로 평등을 뜻하는 단어로 equality와 equity가 있다. equality는 기계적 평등이다. 펜스가 쳐진 경기장에서 모든 관중에게 관람용 발판을 하나씩 준다. 우리말로 ‘형평’에 가까운 equity는 경기를 보기 위해 키 작은 사람에게 3개의 발판을 주는 거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기계적 평등이 논란이 된다. (그나마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기계적 평등(발판)만 보게 되면 근본적 이슈(키)는 보지 못하게 된다. 발판이 없으면 “역시나 키 작은 사람은 무리야”란 생각이 든다. 급기야 키 작은 사람은 아예 경기장에 들어올 생각을 못한다. 그 결과 차별의식은 내재화된다.
입시부정이 전 국민적 화제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장애학생 입시차별은 왜 모 여고 쌍둥이 사건만큼 이슈가 되지 못할까? 사회에 차별의식이 내재된 결과 아닐까.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계에서는 ‘장애차별철폐의 날’이라고 부른다. 장애인을 연민하는 날에서 끝나선 안 된다. 구조적인 차별의식을 없애고 진정한 평등을 모두 추구하자는 거다. 학교현장에서 장애학생, 장애교사 존재부터 인정하면 장애가 무의미해지는 데 한발 더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