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웃음 찾아준 '탈시설'... 文정부 공약인데 제자리걸음

입력
2021.04.19 17:00
24면

편집자주

이왕구 논설위원이 노동ㆍ건강ㆍ복지ㆍ교육 등 주요한 사회 이슈의 이면을 심도 있게 취재해 그 쟁점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주요 이슈의 주인공과 관련 인물로부터 취재한 이슈에 얽힌 뒷이야기도 소개합니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강동구 OO동의 6층짜리 빌라. 빌라는 도서관, 근린공원, 카페, 세탁소, 치킨집, 어린이집 등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준공된 지 1년 남짓한 새 건물이라는 점 말고는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빌라는 발달장애인 14명만이 살고 있는, 서울시가 지원하는 ‘발달장애인 지원주택’. 장애인 거주시설들이 보통 농어촌 등에 고립돼 있는 것과 달리 이곳의 발달장애인들은 동네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도시의 주택가에 산다.

서울시가 발달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165호(戶)가 있다. 입주 장애인들은 보증금과 월세를 내며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고 중간에 완전히 독립해 나갈 수도 있다. 서울시가 운영을 위탁한 충현복지관 소속 인력(9명)과 활동지원사(45명)들이 이곳에 사는 발달장애인들의 생활을 돕고 있다. 관리 책임자인 김세연 충현복지관 지원주택 2팀장은 “보통 장애인들이 사는 곳이 생기면 민원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여기선 상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한 이발봉사를 자청하는 등 지역사회 분위기가 호의적”이라고 설명했다.

탈시설 첫발 떼는 발달장애인들

지난해 연말 이 빌라에 입주한 오유라(28)씨는 꽤 오랜 자립 준비를 했다. 오씨가 8년간의 시설생활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한 건 2015년. 시설에 함께 살던 동료와 갈등이 깊어져서다. 시설을 나와 5년간 자립전환을 위한 준비시설인 체험홈에서 3명의 동료와 함께 살며 홀로서기를 준비한 끝에 지난해 이곳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완전히 자립을 했다. 오씨의 집은 면적 42㎡로 방 2개와 주방, 욕실이 갖춰져 있다. 비록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고 휠체어로 이동을 해야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도 할 수 있고 마음대로 늦잠도 잘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오씨는 말한다. 오씨에게 비로소 일상에 대한 온전한 자기결정권이 생긴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이달부터는 하루 3시간씩 인근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 이달 말에는 생애 첫 월급(91만 원)도 받게 되는데 월세(46만 원)와 휴대폰 요금, 공과금 등 고정지출을 감안하면 넉넉하진 않지만 첫 월급으로 부모님과 동생에게 선물을 할 수 있어 마음이 들떠 있다. 오씨는 “시설을 나오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는데 지내보니 해낼 수 있었다”면서 “여러 사람들과 늘 함께 살다가 처음으로 혼자 있게 돼 좀 외로운 걸 빼면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앞으로 자신과 같은 발달장애인들에게 생활ㆍ진로 등을 조언해 주는 ‘동료상담가’가 되는 게 희망이다.

이 지원주택에는 오씨와 같이 스스로 탈시설을 결정해 독립을 선택한 발달장애인들도 있지만 인권침해로 지난해 폐쇄 결정이 내려진 경기도의 A시설에서 온 중증의 발달장애인들도 거주하고 있다. 방 2개인 한 집에서 공동으로 살고 있는 김은형(가명)씨와 이희영(가명)씨는 지난해 10월 A시설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언어표현 능력은 떨어지지만 김씨와 박씨는 외부인인 기자가 방문하자 큰소리와 몸짓으로 환대했다.

이씨의 활동지원사 박모씨는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표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는 의사 표시가 확실해졌다”며 “요즘 이씨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고 귀띔했다. 이선영 충현복지관 지원주택사업 총괄부장은 “A시설에서는 음식을 믹서기에 갈아주는 경우가 많아 입소자들의 저작기능과 소화기능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곳으로 온 장애인들은 여러 반찬으로 골고루 식사하게 되면서 씹는 능력도 좋아졌고 변비증상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시설 내 인권유린은 과거보다 줄었다고 해도 장애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의식주 제공, 건강권 보장 측면 등에서 탈시설 정책은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방증하는 사례다.


코로나 이후 더 높아진 탈시설 요구

2019년 현재 장애인 거주시설은 1,557곳, 거주인원은 2만9,662명이고 이 중 80%인 2만3,635명이 발달장애로 불리는 지적ㆍ자폐장애인이다. 아직도 30명 이상인 대형 시설에 2만 명(1만8,773명ㆍ2020년) 가까운 장애인이 살고 있다. 장애인들에 대한 탈시설 요구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잇따른 시설 비리에 대한 시민ㆍ인권단체의 문제제기와 함께 공론화됐다. 폭력ㆍ학대로부터의 자유, 입ㆍ퇴소에 대한 자기 결정 등 장애인들의 자유권 확보에 대한 요구로 출발했는데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시설의 집단감염 사태가 이어지면서 건강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에 제출한 ‘장애인거주시설 코로나19 확진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서울 송파구 신아재활원에서 76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모두 19곳의 장애인거주시설에서 확진자가 247명이나 나왔다. 장혜영 의원실에 따르면 장애인거주시설 1,000명당 7.08명이 확진돼 약 1.71명 수준인 일반인(2월 기준)보다 감염률이 4.1배 높다. 시설 장애인들이 건강관리ㆍ감염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가령 정부 지원을 받는 촉탁의는 월 2회 시설을 방문해 진료를 하도록 돼 있으나 유명무실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김종명 성남시의료원 공공의료연구소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의사 한 명이 한두 시간 동안 50~60명의 시설 장애인들을 진찰해야 해 형식적 진료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설 내 약물 오남용 문제도 꾸준히 제기된다. 지난해 9년 만에 대전의 한 시설에서 발달장애인 아들(30)을 데리고 나온 임현주(56)씨는 “진정제 같은 약물을 얼마나 많이 투여했는지 낮에 가도 아들은 눈이 풀리고 멍한 표정이었다”면서 “시설에서 나온 뒤로는 수면장애도 없어지고 밤에 혼자서도 푹 잔다”고 말했다.

시민ㆍ인권운동단체들의 지속적인 탈시설 의제화 노력 덕택에 2011년 장애인거주시설 정원을 30명으로 제한하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이 이뤄지는 등 제도 개선도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택지원 서비스, 퇴소자 정착금 지원, 활동지원 서비스 확대, 공공일자리 지원 등 탈시설을 원하는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정책들도 펼치고 있다. 다만 법적인 근거가 없는 탓에 지역별 격차는 극심하다. 복지부가 집계한 지난해 장애인자립지원금 지원 현황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퇴소하는 장애인에게 1,200만 원의 장애인자립지원정착금을 지원했으나 대구는 1,000만 원, 충북은 500만 원으로 편차가 컸다. 울산ㆍ세종ㆍ충남은 아예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자립주택ㆍ체험홈 등 주거지원 비중도 지자체별로 제각각이다.

현장에서는 지역별 격차보다 사실상 제자리걸음 수준인 정부의 탈시설 지원정책이 문제라고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장애인 탈시설 등 지역사회 정착 환경 조성’을 100대 국정과제로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정작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은 올해 8월 중 발표할 예정이다. 장애인 인권단체들은 집권 4년차인 올해 발표하는 이 정책이 얼마나 힘을 받을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정부의 시설지원 예산은 지난해 5,056억 원에서 올해 5,470억 원으로 매년 증가하는 중이지만, 올해 탈시설 관련 정부 예산은 탈시설지원센터 건립을 위한 2억6,900만 원에 불과하다. 장애인인권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운동의 여준민 활동가는 “문재인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은 낙제점에 가깝다”면서 “탈시설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주거지원 정책 등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탈시설 방향ㆍ속도 이견 조율이 관건

정부의 탈시설 이행의지는 물음표인 반면 지난해 말 최혜영 민주당 의원이 탈시설 정책의 안정적 추진을 위한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국회에서는 탈시설 제도화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향후 10년간 모든 시설의 폐지를 골자로 한 이 법안에는 지역별 탈시설지원센터 설치, 인권침해 의심시설을 직권조사할 수 있는 소위원회 구성 등 장애인 탈시설 지원에 관한 내용이 망라돼 있다.

법안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의 물밑 신경전도 치열하다. ‘탈시설’을 법안 이름에 못 박아야 한다는 장애인인권단체 측과 시설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강화한다며 ‘탈시설’을 법안명에서 제외하자는 시설운영자 간 대립이 대표적이다. 탈시설의 방향과 속도 등을 놓고서도 양측의 입장차는 팽팽하다. 조한진 대구대 장애학과(대학원) 교수는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을 수용할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탈시설 정책을 추진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며 “시설에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하면서 궁극적으로 시설의 폐쇄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허곤 서울시장애인복지시설협회 회장은 “모든 시설 폐쇄가 능사는 아니고 소규모 시설, 지원주택 등 다양한 거주서비스를 마련한 뒤 당사자가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선영 복지부 장애인정책과장은 “10년 내 모든 시설을 폐쇄하자는 주장은 정부가 수용하기는 힘들다”며 “시설 종사자들의 고용보호 등을 전제로 시설이 줄어드는 속도를 높이자는 게 정부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왕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