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여성 손님?

입력
2021.04.19 22:00
27면


코로나19 이후 음식이 사라지거나, 음식이 온 걸 눈치채지 못한 손님이 화를 내는 등 비대면 배달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늘었다. 음식을 문 앞에 놓고 벨을 눌러 달라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절대 벨을 누르지 말라는 손님, 문자를 달라는 손님 등 요구사항도 다양하다. 깜빡하고 본능적으로 벨을 눌렀다가 사달이 난 경우도 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카드 결제가 보편적이었는데, 카드와 음식을 교환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수만 가지 일이 벌어진다. 한 번은 ‘신발장 위에 카드 놓아둘 테니 결제하고 가세요’라는 믿기 힘든 메모가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보니 신발장은 현관문 밖에 있었고 신발장 위에 카드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타인에 대한 믿음에 놀랐고, 카드도난보다 배달노동자와의 만남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배달 왔다고 문을 두드렸는데, 손만 불쑥 나와서 카드를 주고는 내 손에 있던 음식을 낚아채듯 가져간 적도 있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상처였는데, 동료 라이더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만 겪은 일은 아니었다. 대화의 끝은 보통 ‘여자가 원래 싸가지가 없다’로 마무리됐다. 이른바 싸가지 없는 손님 대부분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살짝 열린 문은 싸가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의 표현이었다.

정반대의 손님도 있다. 노크를 했더니 문이 벌컥 열려 깜짝 놀란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 남성이다. 여름이면, 활짝 열린 문 앞에 팬티만 입고 서 있는 남성들이 많다. 배달 노동자에 대한 존중은커녕, 배달라이더 중에 여성이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남성 배달라이더들은 자신이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는 것을 기분나빠하지만, 여성 배달라이더 중 일부는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배달한다. 실제로 대부분 여성 노동자인 가스검침원에 대한 손님의 성폭력이 사회적 문제가 된 바 있다. 물론 손님과 배달라이더 간 젠더 문제에 대한 객관적 자료는 없다. 그러나 범죄에 대한 위협 때문에 남자 신발을 현관에 놓아두는 사람과, 속옷만 입고 활짝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선거가 끝나고 20대 남자와 페미니즘 이야기가 넘쳐난다. 정치인들은 반성문을 쓰듯, 20대 남자를 언급하며 남녀 갈등을 조장하거나 성별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배달현장에서 목격한 현실은 정치인들의 한가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생명과 범죄의 위협으로 공포를 느끼는 것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분 나쁨과 억울한 감정은 동일한 범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최근 자신을 배송노동자로 속여서 스토킹하던 여성의 집에 침입해 세 모녀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라이더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생겨서 억울하지 않냐고 묻는 기자들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 억울하다. 그러나 배달라이더의 억울함보다는 여성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위협과 공포가 더 존중받고 주목받아야 한다.

정치인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징병의 문제를 성별문제로 호도하는 군가산점제도나 세대차이로 대화도 잘 못할 20대 남성들 부여잡지 말고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