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자유’ 아닌 ‘연민’이다

입력
2021.04.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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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국 왕실 역사, 그러니까 사실상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기를 다룬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 시즌4를 보다 재미난 장면을 만났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여왕은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참다 못한 여왕이 이 불문율을 깨고 대처를 “몰인정하고 대립을 일삼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임을 언론에 슬쩍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더 크라운’을 보는 재미의 대부분은 현실 정치라는 민감한 소재를 어떻게 교묘하게 소화해내는지 지켜보는 일이다. 다른 여러 소재처럼 대처리즘에 대해서도 줄타기를 잘하더니 시즌4 막판에 가서야 마침내 ‘하물며 여왕조차도 대처를 싫어했다’는 식의 에피소드를 넣은 걸 보곤 슬며시 웃음이 났다.

웨츠(Wets). ‘보수 혁명의 아이콘’인 대처가 가장 싫어했다는 이들이다. ‘아이고~ 우리 불쌍한 평민들’이라 읊조리면서 눈물 콧물 훔치느라 손수건을 연신 얼굴에 가져다 대는, 늙은 울보 남자 귀족들을 말한다. 계급사회의 위선에 불과하다 해도 오랜 기간 ‘통치’ 그 자체를 업으로 삼아온 귀족들에겐 최소한 ‘백성들을 어떻게든 거둬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 그러지 못했을 경우 수치심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대처에겐 ‘영국 전통 보수의 파괴자’란 정반대의 별명도 함께 따라 다닌다. 전통 보수의 상징, 여왕이 대처를 싫어한 이유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노조를 박살 내기에 앞서서 웨츠까지 박살 냈으니. 나중에 보수당 재집권을 이뤄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보수 앞에다가 ‘인간의 얼굴을 한’ 같은 수식어를 가져다 붙였는데, 아마 ‘대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실토였을지 모른다. 대처식 보수 혁명의 대상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 그 자신이었기에, 장기적으론 결국 보수의 자기 부정과 극우화를 낳았다는 아이러니다.

한국으로 넘어와, 참여정부 시절이니까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길 가다 돌부리에 발만 채여도 ‘이게 다 좌편향 노무현 때문’이라던 보수가 마침내 ‘자유주의’를 내세웠을 때, 정말 많이 웃었다. 뭔가 탈출구를 애써 찾았다는데 어울려 보이지 않아서다. 대선에서 진 게 그렇게나 충격적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자유주의 타령은 요란한 걸로 미뤄 보건데, 보수는 그 자유주의 타령이 이젠 꽤 수지맞는 장사라는 걸 눈치 챈 듯하다.

먼저 수세에 몰렸을 때 상대를 ‘전체주의자’라고 매도할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가치 ‘소수자 보호’가 설마 성소수자 보호 따위일 리가 있겠는가. 야당이 된 보수, 고시 패스한 테크노크라트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들이 소수자이긴 한 건지 모르겠지만.

또 하나, 자유주의는 보수의 책임감을 말 그대로 ‘자유롭게’ 내다버릴 수 있게 해준다. 아르바이트의 어려움에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해야지 방법이 없다”며 해맑게 웃던 얼굴, “세월호 사태는 교통사고”라며 분노하던 얼굴. 우리가 익히 보아온,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식 자유주의의 얼굴이다.

이제 모든 게 대선이다. 보수 응원가가 격렬하게 휘몰아칠 것이다. 판단이야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다만 이번엔 보수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는 성공하는 국가의 비결로 ‘포용적 제도'를 꼽았다. 복잡다단한 그 논의를 애스모글루 교수는 “연민이 곧 혁명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보수에게서 자유주의 놀음 말고, 연민의 얼굴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조태성 정책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