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루라기 대신 전기 충격기, 도망 잘 가려고 운동화 출근해요"

입력
2021.04.18 09:00
뉴욕  한인 직장인들 증오 범죄로 출근 꺼려
재택 근무 신청하고, 외출 때 운동화 신기
LA·필라델피아, 아시아인 무술강좌 관심↑
"증오 범죄 없으려면 인종 간 차이 인정해야"

"회사 가는 출근길이 이토록 두려울 줄 몰랐어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이송희(33·가명)씨는 매일 아침 출근길이 가장 두려운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 이동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끔찍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란다.

이씨는 "얼마 전 뉴욕 지하철에서 흑인 남성이 아시아계 남성을 폭행하고 기절시킨 사건을 보고는 지하철이 가장 위험한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며 "무방비 상태로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할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라고 걱정스럽게 답했다.

지난달 한인을 포함해 아시아인 6명이 숨진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아시아인을 겨냥한 증오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또 최근 뉴욕에서 발생한 연이은 증오 범죄로 한인 사회는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뉴욕 지하철에선 흑인이 아시아인 남성을 폭행하는가 하면, 맨해튼 한복판에서 60대 아시아계 여성이 건장한 흑인 남성에게 폭행당해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주머니엔 열쇠고리형 송곳, 가방엔 전기충격기

뉴욕 맨해튼의 패션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는 백지연(27·가명)씨는 지난주 회사에 재택 근무를 신청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증오 범죄가 속출하면서 나흘가량 재택 근무를 하겠다고 했다. 이 회사는 사무실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재택 근무를 마치고 출근 날이 다가올수록 백씨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그는 아마존닷컴을 뒤져 호신용품을 샀다. 여성용 호신용품으로 인기가 좋다는 자기방어 스틱과 전기 충격기를 주문했다. 휴대용 스틱은 6~20달러대까지 있으며, 전기 충격기는 20~40달러대까지 다양했다.

백씨는 그동안 혹시 몰라 지니고 다녔던 호루라기는 서랍 속에 넣어뒀다. 대신 재택근무가 끝나고 출근하는 날 두 물품을 모두 챙겼다. 끝 부분이 뾰족해 유리를 깰 정도로 강도가 센 호신용 스틱은 겉옷 주머니에, 무게가 있는 전기충격기는 가방에 각각 넣었다.

백씨는 "내가 전기 충격기를 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뉴욕의 아시아계 젊은 직장인들은 지하철 출퇴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곳에서 정보기술(IT) 계열 회사에 다니는 박수영(30·가명)씨는 최근 운동화를 새로 구입했다. 출근 복장에 운동화는 필수가 됐다. 그는 최근 시사주간지 뉴요커 표지를 장식했던 그림 속 모습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표지 속에서 모녀로 보이는 아시아계 여성들은 지하철 플랫폼 앞에서 나란히 운동화를 신고 있다. 박씨는 운동화를 산 이유를 "위험한 상황에서 잘 도망가기 위해서"라며 "이전과 달리 지하철 탈 때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고 무서워서"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외출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대학생 한수원(24·가명)씨는 밖에 나갈 경우 마스크에 모자, 선글라스를 꼭 챙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게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모자 속에 넣고, 얼굴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다는 것. 이런 차림으로 가까운 편의점에 갈 때도 무조건 뛴다고 했다.

한씨는 "증오 범죄가 노인과 여성을 노리는 만큼 조심하자는 것"이라며 "지인은 회사에서 점심 먹으러 나가는 것도 무서워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실제로 뉴욕에서는 최근 아시아인들을 겨냥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14일(현지시간) 미 CNN에 따르면 뉴욕경찰은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조지프 루소(28)라는 남성을 체포했다. 경찰은 그가 최근 한 달 사이 아시아인을 골라 3건의 증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루소는 노인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달 5일 60대 아시아 여성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22일에는 30대 아시아 여성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또 지난 12일에는 70대 아시아 남성을 밀어버렸다.

뉴욕시에는 약 120만 명의 아시아인이 살고 있다. 이는 도시 인구의 14%를 차지한다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뉴욕경찰에 따르면 올해 1~3월 28일까지 뉴욕에서 발생한 동양인 대상 증오 범죄는 31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3배에 달한다.

LA서 韓 합기도 등록↑, 필라델피아선 무술 무료강좌도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증가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호신술을 배우려고 무술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최근 미 CBS방송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국 무술인 합기도를 가르치는 게리 가페자니 관장은 증오 범죄 이후 무술을 배우려고 등록하는 아시아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가르치는 수강생은 4~70세까지 다양하다. 가페자니 관장은 이들에게 상대의 급소를 찾아 압박하는 것에서 공격자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자기 방어 자세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는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운동을 다시 하고 싶어 한다"며 "사람들은 안전함을 느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학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도 있다. 루실 위자자씨는 아들 키아누와 딸 날라니, 두 아이가 이곳에서 합기도 수업을 배우도록 했다. 위자자씨는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자녀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면서 "그렇다고 공격해 맞서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LA의 많은 학부모는 자녀들의 안전에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보니 추씨는 "많은 엄마들이 아시아식 호신술 수업을 찾고 있다"면서 "이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CBS에 말했다.

최근 LA의 팬 퍼시픽 공원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호신술 수업이 펼쳐졌다. 한 아시아계 커뮤니티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아 무료 무술 강좌를 연 것이다. 참가자들은 공격을 받았을 때 피하는 법부터 발차기, 붙잡아 넘어뜨리기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

이러한 무료 무술 강좌는 필라델피아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에서 무술 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들이 힘을 모아 호신술 수업을 제공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 이곳에선 증오 범죄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한 흑인 남성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아시아 여성의 얼굴을 손으로 치는 폭행 사건이 벌어진 것. 더불어 아시아 남성도 흑인에게 폭행을 당했다.

지난해 필라델피아에서 벌어진 아시아인 대상 증오 범죄는 7건이라고 현지 NBC10 방송이 전했다. 이 중 폭행으로 인한 범죄는 3건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증오 범죄가 연거푸 일어나면서 아시아인들의 공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곳의 무술 강사 2명은 무료 클래스를 열어 남녀노소 상관없이 아시아인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달 한 달 동안 매주 일요일에 무료 수업을 하고 있다.

NBC10은 "필라델피아에서 인종 차별과 싸움이 시작됐다"면서 "이는 필라델피아 지역과 미국 전역에서 인종 평등을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아시아계 인권단체인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춰라(Stop AAPI Hate)'는 지난해 3월 19일부터 올해 2월까지 접수된 증오 범죄가 3,700건이 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경찰은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은 좋지만, 필요 없는 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시아계·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등 차이 인정해야"

"아들은 내가 공격받을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정말 끔찍한 세상이에요."

배우 윤여정은 연기 인생 최고의 경험을 앞두고 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고백했다. 25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LA행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데, 증오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려운 듯했다.

특히 미국에 있는 아들의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12일 미 포브스와 인터뷰에서 "두 아들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며 "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미국에 가려고 하지만, LA에 사는 아들이 나의 미국행을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길거리에서 내가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아시아 증오범죄 가해자들은 노인을 노리고 있는데 내가 노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단 윤여정만의 일은 아니다. 업무로 인한 출장이나 가족, 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국행을 계획했던 사람들은 티켓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있다. 제약·바이오업계에서 일하는 김찬우(33·가명)씨는 다음 달 예정됐던 미국 출장 계획이 무기한 연기됐다. 김씨의 의지와 별개로 회사 측에서 반대해서다.

많은 이들은 미국을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있다. NBC10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산카를로스의 한 장로교회에 다니는 친구 사이인, 아시아계 미국인 사비네 원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데버라 켐퍼는 "연대의 목소리를 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색인종인 두 친구는 지난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에 적극 나서고, 올해 반아시아 증오 범죄의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함께했다.

원씨는 "지난해 BLM 운동을 위해 데버라와 가족을 지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면서 "제게는 아시아에 대한 증오심을 멈추기 위해 집회에 아시아인만이 아닌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

1일 뉴욕 맨해튼의 코리아타운에선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한 자리에 집결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분노를 거두고 서로를 이해하자며 연대했다.

한인 송순규(52)씨는 이번뿐만 아니라 지난 몇 주 동안 맨해튼의 차이나타운 등을 돌며 여러 집회에 참석했다. 그때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의 연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송씨는 걱정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더 많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서도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기꺼이 지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우리에 대한 차별이 그들의 것만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서로의 공통 역사를 알고 오랫동안 이어 온 차이점 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지 장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미국 내 아시아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협력은 깊은 역사적, 문화적 유대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흑인 행동주의와 시민권 운동 등 흑인 사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사회학자 타미라 K. 노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 이유는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이 깊고, 상대방의 역사 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강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