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부모' 지운 호적으로 살았지만... "비빌 언덕 없는 고단한 삶"

입력
2021.04.24 04:30
10만 명 추산… 부모세대보다도 관심 못 받아
차별·멸시에 상당수는 신분 감추고 사회생활
"더는 숨을 필요 없어" 일본 상대 보상 청구도

"날 보러 온 아버지가 숨는 거예요. 근데 아버지를 쫓아갈 수 없었어요. 한센인 자식인 걸 들키니까."

한센인 아버지를 둔 50대 A씨는 집 밖에서 아버지를 봤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등교한 딸에게 도시락을 주려 학교 근처에 왔던 아버지는 학생들과 마주치자 황급히 골목으로 달아났다. "한센인을 '전염병을 옮기는 괴물'로 취급하던 시절이었어요." A씨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봤다. 저이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들키면 '한센인 2세'로 낙인찍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국에 10만 명… 자신을 지운 사람들

전국 86개 정착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한센인 1세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이 조명된 이후(본보 3월 27일 자 보도 "남은 삶,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파"... 폐허 속 한센인들의 절규) 그들의 자녀, 한센인 2세의 처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한센병은 유전이 아닐 뿐더러 설령 부모에게 전염되더라도 조기 치료가 가능한 터라 사실상 비환자와 다를 바 없지만, 이들은 '대물림되는 불치병'이란 근거 없는 낙인 탓에 부모 세대의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했다.

한센인 2세가 멸시와 배제를 피하고자 택한 생존책은 신분 감추기. 많은 이들이 부모를 지운 새 호적을 지닌 채 정착마을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정부를 포함한 누구도 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재 9,000여 명 남은 한센인 1세와 달리, 2세들은 '전국 10만 명 이상'이라는 어림치 외엔 인원수조차 파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한국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어렵게 응한 50대 한센인 2세들은 하나같이 '신분을 철저히 가려달라'고 요청했다. "자녀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이들의 깊은 심려에서 한센인에 대한 차별이 여태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대를 잇는 고통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물으며 소외의 역사를 끝내고자 하는 의지도 뚜렷이 감지됐다.

이웃도 국가도 매정한 차별

한센인 2세를 향한 주위의 냉대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A씨는 "학교 다니는 동안 누구 하나 같이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며 "맨날 '문둥이(한센병 환자를 낮잡아 부르던 말) 새끼니까 문둥이지'라고 놀림받았다"고 말했다. B씨는 "평생 부모님과 대중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다"며 "한센인 가족이란 걸 알면 쫓아내는 식당도 많았다"고 돌아봤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그냥 입을 다물게 된다"고도 했다.

공권력이 동원된 체계적 차별도 자행됐다. C씨는 초등학생이 되기 직전이던 1970년대 소록도의 부모 곁을 떠나 보육원에 들어가야 했다. 한센인 자녀를 가족으로부터 떼어 감염을 차단한다는 정부의 격리수용 정책에 따른 것이다. 생이별한 부모님과는 가끔 단체 상봉이 이뤄졌는데, 길게 줄을 선 부모와 자녀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방식이었다.

A씨 형제들은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를 두고 먼 분교에 다녀야 했다. "학부모들이 한센인 자녀를 학교에 들이지 말라고 반대했다. 떼지어 몰려와 (한센인들에게) 돌을 던져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고개 너머에 한센인 2세가 다닐 조그만 학교(분교)가 따로 생겼다." 역시 분교 출신인 C씨는 "일반학교의 한센인 배제로 전국에 전용 분교가 많이 생겼고, 그 탓에 한센인 2세는 성장기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센인 2세의 학교 배정 차별은 먼 얘기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한센인 정착마을 내 분교 졸업생들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부당하게 배정했다는 조사 결과를 낸 때가 2007년이다.

출신 숨기려 이중 호적도 감수

부모가 희귀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극심한 차별과 혐오에 내몰린 한센인 2세들이 자신의 출신을 감추려 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성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정착마을에서 양돈・양계 등 부모의 생업을 이어받거나 사회에 진출해 비한센인과 부대끼는 것인데, 한센인 2세라는 정체를 드러낸 채 후자를 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적 낙인을 감수하고 급격히 낙후되고 있는 마을에 남아 미래가 불투명한 가업을 물려받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C씨는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살면서 새 호적을 만들었다. 공적 서류상 그는 부모 없는 고아다. C씨는 "당시 한센인 2세들은 한센인 부모의 존재를 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적을 하나 더 만들곤 했다"고 말했다. 원래 호적을 말소하지 않아 호적제 폐지 전까지는 호적이 2개였다는 그는 한센인 2세 중 자신처럼 '이중 호적'을 보유했던 이가 드물지 않다고 했다.

B씨도 새로 만든 호적으로 삶을 꾸려왔다. 그는 "아무리 한센병이 옛날 일이라지만 여전히 한센인이라 하면 기피하고 보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며 "그렇다고 한센인 가족을 보호하는 정책이나 제도는 없다 보니, 결혼할 때든 직업을 구할 때든 새 호적을 쓰는 게 편했다"고 했다. 부모 이름이 없는 새 호적을 '과거를 없던 일로 지우고 가면을 쓰고 사는 일'에 비유한 B씨는 "지금도 (원래 가족 관계를) 밝힐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처럼 인정 서류나 등록증을 내면 뭘 지원해주기를 하나. 숨기는 게 상책이지."

그러나 새 호적이 새 삶을 보장하진 않았다. 초등학교 취학 단계부터 순탄치 않다 보니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혈연이나 학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동체에 녹아들기란 쉽지 않았다.

C씨는 "한센인 2세들은 어릴 때부터 배제당하는 삶을 살다 보니 '비빌 언덕'이 없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며 "더러 출세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의 10%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센인 2세 대다수가 중·장년이 된 지금도 신분을 숨겨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이혼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고 C씨는 말했다. 한동안 부모님을 돕고자 정착마을에 살면서 축산업에 종사했다는 B씨는 "건강이 여의치 않은 부모님도 챙겨야 하고, 이래저래 한센인 2세가 유복하게 살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더는 숨을 이유 없다" 일본에 피해 보상 청구

사회의 관심 바깥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한센인 2세들이지만, 최근 이들의 행보에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센인 자녀 및 형제자매 69명이 지난 19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센인 가족 피해자 보상 청구서를 제출한 것이다. 소록도 격리 수용 등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한센인 격리 정책으로 인해 가족도 차별받는 피해를 봤다는 취지다. 한일 변호인단은 오는 26일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 보상 청구 경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한센인 2세들의 이런 주도적 움직임은 과거사 피해와 인권 침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사회적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국민권익위원회가 본보 보도 등에 응답해 한센인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정착마을 전수조사 계획을 밝히면서 오래 묻혔던 한센인 문제가 공적 관심사로 부각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일본 정부가 2019년 6월 법원 판결을 받아들여 한센인 가족에게 과거 격리 정책에 따른 피해를 사죄하고 배상한 점도 국내 한센인 2세들을 고무시켰다. 일본의 한센인 배우자와 자녀들은 정부 조치에 따라 1인당 500만 엔(약 5,140만 원)에서 1,800만 엔(약 1억8,500만 원)까지 배상받았다.

이번 피해 보상 청구를 돕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는 "우리나라 한센인 2세도 국가를 상대로 가족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며 "합당한 배상금과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최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