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전에 시댁 가야’ 남편이 정한 ‘며느리 도리’ 지켜야 하나요

입력
2021.04.12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희는 결혼한 지 4년 된 맞벌이 부부입니다. 결혼 전 가부장적인 시댁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편이 있고, 가까이 살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시댁과의 갈등으로 남편과도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편과 시댁은 제가 명절과 제사 때 미리 가서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큽니다. 전 미리 가서 음식을 하진 않지만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고, 설거지도 다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음식부터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절 비난합니다.

한번은 설에 저녁을 먹다가 고기를 굽던 시아버지가 제게 “넌 요즘 세상에 태어나서 좋겠다"면서 "옛날에 태어났으면 넌 나한테 죽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농담을 한 건데 웃으면서 그걸 받아주지 못하느냐”라며 “네가 예민하고 우리 집안과 친해지지 않아서 그러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이셨어요. 저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불편해서 울음이 터졌고, 그다음 날 불편해서 도망치듯 시댁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제 친정에서 “네가 우리 집 분위기 안 좋게 만들어 놓고 왜 너네 집에서는 화목해야 되냐"며 "결혼할 때 가져온 돈 돌려줄 테니 집 구해서 나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이후에도 시댁과 크고 작은 갈등이 반복됐습니다. 지난해 시아버지 생신 때 저는 전화를 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생신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용기를 내 연락을 드린 건데 시부모님은 저녁에 전화도 아닌 짧은 메시지를 보냈냐면서 서운하다며 이후로 제 연락을 받지 않으셨어요. 남편은 제가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하지 않아서 이런 갈등이 생겼다고 합니다. 남편이 생각하는 며느리의 도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전화하기’ ‘명절과 제사 때는 미리 가서 돕기’ ‘평소에 살갑게 잘하기’라고 합니다. 이게 뭐가 어려울까 싶지만 제겐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제 친정 집에 가서는 항상 친구를 만나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옵니다. 제 부모님은 남편이 친구 만난다고 하면 내심 서운해 하면서도 항상 이해해 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너무 안 좋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앞으로는 각자 ‘셀프 효도’하자고 말했더니, 남편은 ‘반반 결혼’하자며 집값이며 살림살이를 정산해서 반반으로 나누자고 합니다. 저는 탄탄하고 행복한 부부관계를 우선으로 만들고 싶은데, 매번 양가 문제로 남편과 심각하게 갈등을 겪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유진(가명ㆍ31ㆍ직장인)

유진씨, 사연만 놓고 보면 며느리를 대하는 시부모님의 방식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유진씨가 힘들어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유진씨 부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시댁과의 갈등이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제가 보기에 유진씨 부부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이해가 굉장히 약한 것 같습니다. 정작 본질인 부부 관계의 갈등에는 접근도 못하고 계속 며느리, 사위 도리와 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얘기만 하다가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끝이 나는 것 같아요.

유진씨 부부는 살아가면서 어떠한 가정을 이루자는 얘기나 함께 살면서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의논하거나 공유한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결혼생활에서는 가사 분담 비율이 3대 7인지 5대 5인지, 명절에 어디를 먼저 가고 몇 시간 머무를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언제나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사정이 생깁니다. 부부라면 이런 상황을 의논하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함께 하고 처리해나가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유진씨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사람은 각자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갈등을 해결하고 문제를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지요.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다른 유진씨 입장에서는 시아버지의 말투나 며느리를 대하는 방식이 눈물이 날 정도로 당황스럽고 마음이 좋지 않았을 거예요. 또한 시아버지의 말투보다 며느리가 예민하고 농담을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탓을 전가한 시어머니에게도 서운했을 거예요.

유진씨, 사회가 많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삶도 많이 바뀌었어요. 가정 내 역할도 자연스럽게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부모님 세대는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달라진 관계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갈등을 빚는 일도 많습니다. 전통적인 관습에 맞지 않은 상황도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부모님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도리를 다 하고 살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각자의 사정이 다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니, 매주 오라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몇번을 왜 일찍 못 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할 수 있다면 기본적인 도리를 하고 살면 좋습니다. 하지만 회사나 학교에서 규칙을 정하듯 ‘추석에는 이틀 전에 간다’ ‘한 달에 한 번 전화한다’는 식으로 규칙을 만들면 그걸 지키지 못했을 때 상황을 유연하게 처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규칙을 지키는 데 삶이 매몰돼 버리는 거지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사정이 생길 수 있고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하지, 규칙을 꼭 지켜야 한다면서 상대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게 되면 갈등을 유발할 위험이 커집니다. 규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지키지 못했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지요. 특히 가족처럼 중요하고 가까운 관계에서는 규칙을 정했을 때 이해보다는 요구가 앞서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이해를 전제로 맺어진 가족들이 서로 이해하기는커녕, 가족이라는 이름을 굴레로 삼아 지나치게 요구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갈등을 어떻게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갈등 상황에 대처할 때 핵심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기반으로 해야 해요. 예를 들어 아버지가 사과를 먹고 싶어요. 시험을 앞둔 큰딸은 공부하는 중이고, 작은딸도 일하느라 바쁘다면 이 아버지의 사과는 누가 깎아야 합니까. 아버지 본인입니다. 아버지가 '사과를 먹고 싶은데 딸들이 아무도 안 깎아주네. 다 키워놨더니 소용없네'라는 것은 그럴 상황이 안 되는 딸들에게 매우 요구적인 태도예요. '딸들이 다들 바빠서 내가 깎아먹어야겠구나'라는 게 합리적이고 타당한 게 아닐까요. 이런 방식이 인간을 중심에 두고, 갈등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겁니다. 규칙, 중요하지요. 약속을 지키는 것,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러나 지켜야 할 약속이나 규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보다 그 상황에 처한 인간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겁니다.

딸들이 바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사과를 깎아드리는 게 맞아요. 시아버지가 고기를 굽다가 며느리한테 고기를 구우라고 눈치를 주는 건 좀 요구적인 태도죠. 구울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이 굽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해요. 시아버지가 그 상황에서 제일 덜 바쁘고 여력이 되면 가족을 위해서 고기를 구우면 되고 그렇게 하면 모든 가족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이고, 어떤 일을 해나갈 방도이지요. 그래서 ‘도리’는 것은 ‘이래야만 한다’가 아니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유진씨의 말대로, 시부모님이 가부장적이고 좀 요구적인 분들인 건 맞아요. 하지만 유진씨의 문제는 남편과의 관계예요.

우선 남편에게는 규칙보다 갈등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하고, 그 기본은 인간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남편은 ‘며느리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태도보다 그 상황에 처한 아내의 입장을 먼저 이해해보고, 아내와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유진씨에게도 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효도는 셀프로 하자’는 말은 한편으로 합리적인 것 같아 보여도 그렇게 규칙을 정하면 거기에 갇혀서 상대를 볼 수 없게 돼요. 유진씨가 시간 여력이 되고, 내킨다면 명절에 시댁에 미리 가서 음식준비를 조금 도와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쁠 때는 양해를 먼저 구하고요. 유진씨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현실에 맞춰서 대처하는 게 필요해요. 결국 그게 셀프인 거지요. 시아버지가 가부장적이고 요구적인 분은 맞지만 유진씨도 시아버지를 중심에 두고 '평생을 저렇게 살아오셨고, 시아버지는 저렇게 말하고 생각하시는구나. 그냥 원래 그런 분이구나'라고 한번 이해해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아버지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당신이 받아들이기 편하게 대해주지는 않으니까요. 사람마다 특징이 다 다르고,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너무 마음 상하지 않고 유연하게 넘기려면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유진씨와 남편은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 게 좋을까요. 저 같으면 이렇게 말해볼 것 같아요. '우리가 양가와 갈등을 빚는 건 어쩌면 가치관이 서로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것일지 몰라. 누구나 가치관이나 환경이 다르지만 그걸로 갈등하니,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자주 가진 않지만 양가에 서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보자. 나도 시간이 되면 내려가서 음식도 돕고 할게. 하지만 사정이 생기면 그렇게 하지 못할 때도 있을 거야.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나를 나쁘다고 비난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부부는 힘들 때 서로 이해해주는 게 필요하잖아'라고 말이죠. 유진씨는 시부모님보다 당신을 비난하는 남편에게 더 서운하고 억울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거예요.

'너네 집은 왜 그러니'라는 식의 얘기는 피하세요. 부부 간에 비난과 경멸, 모든 탓 전가, 지나친 방어는 피해야 합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화가 나도 배우자나 자식을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집이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든 집이라는 공간은 가족 모두의 안식처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양가문제를 두고 소통을 할 때 '돈은 얼마씩 낼까' '효도는 셀프' '우리 집 몇 번, 너네 집 몇 번' 등의 규칙을 너무 경직되게 정하면 갈등이 더 심해질 수 있어요.

유진씨에게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얘기는 모든 생각과 결정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거예요.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스스로 결정하는 거라고 생각해야 해요. 남편이 시켜서가 아니라, 규칙을 지켜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가 아니고요. 며느리로, 아내로 요구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스스로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결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완벽할 순 없어요. 다만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진씨, 결혼생활의 기본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게 아닐까요. 양가 문제는 제쳐두고 두 분의 그런 마음을 먼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그렇게 열심히 남편과 함께 노력해 보시고 그래도 갈등의 골이 좁혀지지 않으면 그 때는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민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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