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범죄물이다. 그동안 보았던 범죄 드라마 중 최고를 꼽는다면 '로 앤 오더' 시리즈다. 하나의 사건으로 한 시즌을 끌어가는 범죄 드라마가 요즘 경향이지만, 매회 한두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전통적인 형식도 여전히 좋다.
'로 앤 오더'의 제작자 딕 울프가 만든 작품은 모두 신뢰한다. 1980년대 인기 범죄물 '마이애미 바이스'의 공동 제작자였던 딕 울프가 유명해진 작품이 1990년 시작한 '로 앤 오더'. 보통 범죄물이 범죄 수사나 법정 중 하나에 집중하지만 '로 앤 오더'는 전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하면 후반에는 검사를 중심으로 재판 과정이 그려진다. 증거가 확실하고 자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유죄가 나오지 않는다.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서, 정치적인 요인이나 돌발 상황으로 범인이 풀려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 앤 오더'는 범죄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추악함을 리얼하게 너무나 냉정하게 보여줘서 숨이 막힌다.
'로 앤 오더'는 2010년까지 20년간 이어졌고, 많은 스핀오프(기존 프로그램에서 새롭게 파생된 콘텐츠)를 만들어낸 명작이다. 1999년에 시작한 '로 앤 오더: SVU(성범죄수사대)'는 지금도 방영 중이다. SVU는 Special Victim Unit의 약자로 여성, 아동, 노인, 동성애자 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팀이다.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2001년 첫 선을 보인 '로 앤 오더: CI(뉴욕 특수수사대)'는 11시즌까지 이어졌다. 2009년과 2010년에는 각각 '로 앤 오더: UK'와 '로 앤 오더: LA'가 만들어졌다. 배심원을 다루거나 다큐 스타일로 만든 스핀오프도 있었다.
'로 앤 오더' 시리즈는 저마다 개성이 있다. '로 앤 오더'는 피해자나 형사, 검사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고 사건의 전후 과정을 건조하게 전개한다. 범인을 잡는 과정의 긴장이나 극적 요소보다는 하나의 사건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 파고든다. '로 앤 오더: SVU'는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인 사건을 주로 다루기에 쉽게 감정이 흔들린다. 참혹하고, 서글프고,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SVU의 형사들도 그렇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풀려난 범인을 폭행하거나 죽이기도 하고, 일상생활과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 결국 떠나버린다. 말단 형사로 시작하여 지금은 팀장이 된 올리비아 벤슨은 어머니가 강간을 당해 태어난 과거가 있다. 흑인인 핀 투투올라 형사는 이혼했고, 아들이 게이다. 각자의 과거, 환경 때문에 그들은 어떤 사건에 더욱 공감하거나 분노하기도 한다. 그들 역시 인간이니까.
'로 앤 오더' 시리즈의 공통점이라면 지극히 냉정한 리얼리즘이다. 일관된 형식도 있다. 매 신마다 두둥 하는 음악과 함께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장소가 나온다. 감정을 끌지 않고 상황만 보여주고 다음 장면으로 빠르게 넘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무리 충격적인 결말이나 상황이 벌어져도 단호하게 끝내고 바로 제작자 딕 울프의 이름이 등장한다. 인물에 공감하거나 감정으로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치밀하게 사건의 의미를 짚어내는 것이 중심이다. '로 앤 오더: SVU'를 보면, 지난 20여 년간 미국 성범죄의 주요한 양상과 쟁점을 거의 파악할 수 있다. 실제 사건에 기초한 에피소드가 많고, 법이나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정밀하게 현실을 반영하니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빠져나가는 범인도 많고, 억울하게 높은 형량을 받거나 인생이 망가지는 이들이 너무 많다. 너무 아쉽고, 너무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것이 '로 앤 오더' 시리즈의 매력이고 장점이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이 승리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은 내내 억울했다. '로 앤 오더' 시리즈를 너무 좋아하면서도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딕 울프가 2014년에 시작한 '시카고 피디'를 보면서 갈증을 약간 해소할 수 있었다. 딕 울프는 2012년 시카고의 51소방서를 무대로 한 '시카고 파이어'를 성공시킨 후 차례로 범죄물 '시카고 피디'와 병원물 '시카고 메드'를 론칭한다. 인물 관계가 얽혀 있고, 시즌에 한 번 정도는 크로스오버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로 앤 오더: SVU'만 남은 후, 시카고를 무대로 한 드라마 세 편으로 딕 울프는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시카고 피디'에서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정보팀을 이끄는 행크 보이트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 때로 불법과 폭력을 허용한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범죄자를 보이트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은밀하게 죽이기도 한다. 위법한 행위이지만 속은 후련하다. '로 앤 오더' 시리즈에서 너무 리얼하게 현실의 악행들을 그려내기 때문에 답답한 시청자의 울분을 해소하려 '시카고 피디'를 만든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카고' 시리즈를 멋지게 성공시킨 딕 울프는 2018년 'FBI'를 시작한다. '크리미널 마인드', '마인드헌터' 등 FBI 요원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많이 있었다. 주로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스토리였다. 'FBI'는 뉴욕 지부를 무대로 연방수사국이 맡는 테러리스트, 조직범죄, 스파이, 증오범죄 등을 다양하게 다룬다. 주인공은 파트너인 메기 벨과 오마르 아돔(OA) 요원. FBI 집안 출신인 벨은 얼마 전 기자인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읽어내며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이집트계 미국인 OA는 특수부대 출신이고, 이슬람 테러집단에 침투하는 위장 임무를 맡았다가 뉴욕지부로 왔다. 대조되는 성격과 배경을 가진 벨과 OA는 서로의 단점을 채우며 복잡한 사건들을 해결해 간다. OA는 미국 TV 드라마에서 첫 아랍계 미국인 주인공이다. 여성인 지부장은 탁월한 프로파일러이고, 남성인 부지부장은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난 이혼남이다.
'FBI' 1화가 시작되면, 건물이 폭탄테러로 무너져 내린다. 2화에서는 뉴욕 맨해튼 도심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가 된다. 범인을 추적하는 벨과 OA를 따라가면 지금 미국 사회의 강력 범죄들이 어떤 양상인지 어렴풋이 들어온다. 범죄물은 단지 범죄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게임이 아니라 범죄를 통해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역할을 한다. 딕 울프는 'FBI'에서도 지금 미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다. CBS에서 방영된 'FBI'는 매회 평균 1,300만 명 시청자가 봤다. 23시즌을 맞은 NBC의 '로 앤 오더: SVU' 평균 시청자 수는 매회 평균 500만 명이다.
성공을 거둔 딕 울프는 바로 스핀오프 'FBI: 모스트 원티드'를 만들었다. 악명 높은 지명수배자를 쫓는 FBI 단독팀의 이야기다. 'FBI'가 벨과 OA를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뉴욕 지부 전체의 사건 수사 과정을 그린다면, 'FBI: 모스트 원티드'는 소수로 구성된 팀이 독자적으로 범죄자를 추적하는 것을 보여준다. 범죄자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악하는 팀장 제스 라쿠르아는 군인인 아내를 전장에서 잃고 딸과 함께 살아간다. 아내는 아메리칸 원주민 출신이다. 제스의 설정에서 보이듯 'FBI: 모스트 원티드'는 미국의 인종 문제와 혐오 범죄 등을 정면에서 드러낸다. 딕 울프의 드라마가 모두 그렇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그려내는 범죄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