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8년 전인 2013년 3월 31일 강원 원주시 부론면 소재 건설브로커 윤중천씨의 별장을 압수수색했을 때, 윤씨 사무실에선 검사와 변호사, 판사 등 법조계 인사들 명함이 쏟아져 나왔다. 검사 5명, 경찰 7명, 판사 2명 명함과 함께 군 간부와 국가정보원 인사 명함도 6장 발견됐다.
경찰은 명함을 비롯해 별장에서 발견된 윤씨의 2007~2010년 수첩형 다이어리, 디지털포렌식을 통해 확보한 윤씨의 휴대폰 속 전화번호부 및 통화내역 등에서도 유력 인사의 연락처를 여러 개 파악했다. 윤씨 전화번호부에는 30명의 전·현직 검사와 변호사 연락처가 저장돼 있었고, 이 중 4명과는 윤씨가 직접 통화한 흔적도 나왔다.
당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과 윤씨와의 관계를 추적했던 경찰 관계자는 "검사를 비롯해 모든 인사들에 대해 다 물어보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밝혔다. 경찰은 특히 윤씨 휴대폰에서 발견된 김학의 전 차관 연락처 4개에 주목했다. '학의형' '김학의형' 'OOO학의형' 등으로 저장된 연락처들은 김 전 차관이 실명 또는 차명으로 사용하던 휴대폰으로 확인됐다. 윤씨는 김 전 차관을 '학의형'이라 부르며 허물 없이 지냈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법조계와 아무 연고도 없는 건설브로커가 어떻게 이토록 화려한 인맥을 쌓았던 걸까. 한국일보가 입수한 1,249쪽 분량의 김학의 성 접대 사건 관련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 결과보고서를 통해 윤씨가 살아온 방식을 분석했다.
윤씨 주변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1990년대 각종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았고, 2000년에는 건설사 '중천산업개발' 대표로 취임해 공공주택과 골프장 개발 사업 등을 벌였다.
윤씨는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법조차 모르는 '컴맹'이었다. 윤씨와 내연 관계였던 K씨는 2013년 3월 19일 경찰 조사에서 "윤중천을 대신해 모든 문서작업이나 동영상 같은 작업을 돕는 사람이 있다"고 진술했다. K씨가 윤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선 "당신이 빨리 메일을 만들어 마음에 있는 말들을 전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당신 메일 비밀번호는 전화번호 뒷자리예요"라며 메일 사용을 권하는 내용도 발견됐다. 윤씨가 작성한 문자메시지에선 "아침에 전화할께(게). 잘자. 마의달링" "전화 안 받고 죽을 줄 알어(아). 나 화났어" "전화가 왜 않되(안 돼)?" 등 띄어쓰기나 맞춤법 오류도 자주 발견된다.
윤씨는 체계적이고 합리적 경영자라기보다는 사업권을 따내는 데 주력한 영업형 브로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윤씨가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면엔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다.
1961년생인 윤씨는 충북 제천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해병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윤씨는 빌라 분양 사업에서 성공했고, 이를 토대로 각종 개발사업을 했다. 문제는 윤씨가 정당한 방법을 통한 입찰과 인허가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윤씨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인허가권자와의 인맥과 친분으로 진입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윤씨의 믿음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는 인맥과 친분을 통해 수백억 원의 대출을 받았으며, 뇌물로 대형 공사도 쉽게 수주했다. 윤씨는 2006년 8월 지인을 통해 서울의 한 저축은행 임원을 소개받았다. 당시 '목동 공동주택 개발사업'을 추진하던 윤씨는 시공사 선정도 하지 못했고 주민동의서도 받지 못했지만 대출심사위원장이던 해당 임원은 심사위원들을 설득해 240억 원을 대출받았다. 윤씨는 그 대가로 그에게 2억 원짜리 빌라를 제공했다.
윤씨는 2010년 3월 강원도 춘천의 골프장 건물 공사를 수주할 때도 뇌물을 이용했다. 그는 시공사 임원에게 3,000만 원, 시공사 본부장에게 상품권 200만 원어치와 그림 1점을 주고 공사를 낙찰받았다. 재판부는 윤씨에 대해 "유력자 및 재력가와 친분 형성, 그들에 대한 접대에 골몰했다"고 평했다.
윤씨의 화려한 인맥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해병대'와 '충청도'다. 윤씨는 해병대 동기와 선후배, 충청권 유력 인사를 통해 또 다른 유력자와 사업가를 소개받는 식으로 발을 넓혔다.
윤씨는 해병대 인맥을 통해 중견그룹 부회장을 소개받았으며, 전·현직 군 장성과도 친분을 쌓았다. 윤씨와 친분이 있었던 감사원 고위인사 또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윤씨는 해병대 전우회 행사에 참석해 100만 원씩 후원금을 쾌척했으며 동기 모임도 원주 별장에서 진행하는 등 해병대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윤씨의 군 인맥 관리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진상조사단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해병대 출신의 한 인사는 "주한미군 해병대 부사령관과 그 처를 2008년 7월 별장에 데리고 가서 윤중천에게 소개시켜 줬다"며 "이후 부사령관이 윤중천에게 2억5,000만 원을 빌려줬는데 돌려받지 못했다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윤씨는 동향인 충청권 인사들과도 친분을 다졌다. 별장에 자주 드나들었던 충청권 건설업체 회장 A씨와 요식업체 사장 B씨는 충북 제천과 충주 출신이다. 윤씨는 이들에게 접근해 동향 사람임을 강조하며 개발사업 공동 투자를 제안하는 등 사업 파트너로 대우했다. A씨와 B씨는 2006년 8월 윤씨와 여성 3명을 동반해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윤씨가 이들을 깍듯이 대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윤씨의 법조계 인맥은 충청권 인사를 연결고리로 형성됐다. '범방위원'이라 불리는 법무부 산하 범죄예방위원회(현 법사랑위원회) 위원은 지역 유력가들의 검찰 내 인맥을 연결하는 핵심 조직인데, 윤씨는 범방위원들을 통해 검사와 변호사들을 알게 됐다.
범죄예방위원회는 1965년 6월 설립된 갱생보호공단의 후신이다. 현재는 법사랑위원회 명칭으로 바뀌었는데, 일종의 자원봉사단체다. 전국연합회 추천을 받아 범방위원이 되면 임기 3년간 출소자 갱생과 범죄예방 업무를 하게 된다. 출소자를 고용할 수 있는 지역 기업가나 종교인, 퇴직 교원 등이 맡는 경우가 많다.
별다른 혜택이 없는 명예직이지만, 범방위원이 되면 보이지 않는 이점이 많다. 가장 큰 혜택은 검사와의 친분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각종 회의나 행사에서 검사들과 만날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식사나 술자리로 이어지며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된다. 2010년 '검사와 스폰서' 관계를 폭로해 화제가 됐던 정모씨 또한 범죄예방위원회 전신인 갱생보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윤씨도 대검 진상조사단 2차 면담에서 "평소 친하게 어울리던 A씨와 B씨가 김학의를 소개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윤씨가 언급한 A시와 B씨는 모두 충주지청 범방위원을 지냈다. 김학의 전 차관도 1997년 충주지청장으로 재직했다. B씨는 2013년 7월 31일 검찰 조사에서 "제가 고향이 충주이고 그곳에서 범죄예방위원을 했는데, 김학의 차관이 충주지청장을 했기 때문에 두세 번 회식할 때 봤습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윤씨와 연루설이 돌던 법조계 인사 중 상당수가 충주지청 근무 경력이 있다.
윤씨는 김학의 전 차관을 비롯해 서울과 춘천, 충주 등에서 근무하는 전·현직 검사, 판사, 변호사와 관계를 넓혀나갔다. 과장과 허풍이 심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법조계 네트워크가 탄탄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윤씨는 "어릴 때 검사가 되고 싶었고 해병대를 나오면서 투철한 국가관을 갖게 됐으며, 때문에 검사 일을 동경하고 좋아했다"며 법조계 인사들과의 친교 이유를 설명했다.
윤씨 인맥은 무한정 뻗어나갔다. 유명 병원 전문의부터 연예인 친인척, 대학 교수, 호텔 사장 등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윤씨는 각종 단체와 협회, 종교단체 모임, 친목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윤씨는 이들에게 여성들을 소개했고, 때로는 소개받기도 했다.
윤씨는 유력가들과 평일 저녁 서울시내 5성급 호텔 식당이나 바에서 식사하고 노래방에 갔으며, 주말에는 수도권 골프장에서 검사들과 라운딩을 즐겼다. 윤씨는 주말마다 개인 혹은 가족 단위로 유력가들을 자신의 원주 별장에 초대했다. 그렇다고 윤씨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인사 모두에게 성 접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윤씨는 본인과 유흥을 즐기는 이들을 '멤버'라고 칭했다.
윤씨는 유력가의 취향과 성격, 사업상 필요성을 고려해 성 접대를 자연스럽게 제안하고 제공했다. 심지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며 성 접대한 경우도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한 대학교수는 "2007년 8월 21일 윤중천이 서울 역삼동 호텔 바에 있다고 하며 '생일 축하해줄 테니 나와라'라고 해서 갔다가, '집에 가서 한잔 더하자'는 말에 윤중천 집으로 가게 됐다"며 "윤중천이 어떤 여자에게 전화해 '손님이 왔으니 집으로 빨리 오라'고 했고, 상대 여자는 잠을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지 오기 싫어하며 '못 간다'고 했는데, 윤중천이 강압적인 목소리로 '무조건 오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김학의 전 차관은 윤씨의 특별관리대상이었다. 2013년 경찰 조사에선 피해자와 참고인 입을 통해 윤씨가 김 전 차관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진술이 나왔다.
윤씨 운전기사였던 C씨는 "당시 윤중천 회장이 김학의 검사를 칭하면서 '학의형은 검찰총장까지 올라가실 분이니 내가 잘 보여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며 "김학의 검사를 통해 형사사건 청탁이나 법조계 인맥을 활용하기 위해서 수시로 만나 친분을 쌓은 것 같고, 자기가 알고 지내던 여성들을 김학의 검사에게 소개시켜 유흥을 즐기도록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김 전 차관과 성관계를 했다고 인정한 여성 L씨도 경찰에서 "김학의는 윤중천이 '학의형'이라 부르며 온갖 비위를 맞추며 중요한 사람이라고 저에게 세뇌시키듯 잘 모셔야 한다고 했다"며 "김학의가 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을 거부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고 밝혔다. 윤씨는 L씨가 김 전 차관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경우 욕을 하거나 "학의형도 기분 다 망쳤잖아, 씨OO아"라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랬던 윤씨는 평소 주변인에게 "검사장 승진 대상자에 자신(김 전 차관)이 거론되지 않는다고 푸념하길래 알고 지내던 청와대 인사에게 청탁을 세게 했다"고 말하거나 "(김 전 차관) 성관계 동영상이 있는데 나중에 한번 크게 써먹을 거야"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김 전 차관 앞에선 잘 따르면서, 뒤에선 그를 이용할 생각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윤씨의 성공가도는 2007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윤씨는 수백억 원대 대출을 받아 추진하던 목동 공동주택개발이 실패하면서 빚을 변제하지 못하게 됐고,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인맥에 대한 윤씨의 집착은 멈출 줄 몰랐다. 채무에 시달리던 윤씨는 2010년대 초반까지 서울 양재동에 모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원주 별장에서 접대를 계속했다. 윤씨는 쌓인 빚을 그동안 맺은 인맥을 통한 새 건설사업 등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이 빚이 결국 모래성 같았던 윤씨 성공의 발목을 잡았다. 윤씨가 그토록 매달렸던 인맥도 빚 앞에선 소용 없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26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알선수재 등 혐의로 윤씨에게 징역 5년6월과 추징금 15억 원을 확정했다.
"대한민국에서 윤중천이를 이길 자가 없다"며 자신만만해 하던 윤씨. 그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만든 건 법과 공정이 아닌 인맥과 친분이었고, 규칙이 아닌 반칙이었다. 안타깝게도, 윤씨의 성공 방정식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검사와 변호사에게 향응을 제공한 라임자산운용의 전주(錢主) 김봉현이 대표적이다. 당시 윤씨와 어울렸던 사람들은 김 전 차관을 제외하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윤중천ㆍ김학의 백서
<1> 면담보고서의 이면
<2> 진상조사단의 실체
<3> 반칙 : 윤중천이 사는 법
<4> 이전투구 : 김학의 동영상
<5> 법과 현실 : 성접대와 성착취
<6> 동상이몽 : 검찰과 경찰
<7> 반성 : 성찰 없던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