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얻는 방법은 권력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관심을 끈다. 나 같은 정치 혐오증환자도 가끔 어떻게 권력이 만들어지는지 들추어 본다. 정치판이라는 배덕의 인간 정글을 헤엄치며 권력을 그러쥔 사람들의 중심에는 ‘정치인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그 언어는 관료 체제의 중심에서 한 자리 만드는 혁혁한 중간자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항상 선거기간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또 다가온 선거철에 다량의 홍보 전단을 받았다. 펼쳐 보니 황폐하고 음습한 나라로 오라고 손짓하는 피지 낀 얼굴이 웃고 있다.
사람들은 말투와 글로 서로를 판단한다. 객관적으로 보는 눈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말로.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든 카메라 앞에서든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도저히 소처럼 한가한 호기심으로 그 삼 분 전략을 들어줄 수 없다. 곳곳마다 숨이 막혀 한 단어도 들을 수 없다. 모든 용어가 헌법의 용인 하에 사용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뇌가 없는 어휘 선택, 영원히 동의할 수 없는 트집, 대화란 대립뿐이라는 강령, 무치한 질문만 요구되는 내부 지침, 뼛속까지 얼어붙는 저주, 물에 빨아 흐릿해진 의미,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른 낱말, 저열한 트집, 쪼잔한 목소리, 타인을 부검하는 비하의 언어, 교활하고 무자비한 데다 그 자체로 지긋지긋한 말, 덧붙이기에도 너무 늦은 말, 저잣거리에서 멱살 잡고 드잡이하는 이들보다 치졸한 말… D-급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귀뼈가 부서질 것 같다.
정치인들 거개는 국내외 유수의 대학을 나왔고, 집안부터 누대에 걸친 부자인 데다, 스스로 어떡해서든 일군 부도 헐 소리 나오는, 누가 봐도 똑똑한 사람들인데 뭘 배우고 뭘 읽은 건지 까닭을 알 수 없다. “저런 사람이 이 도시를 이끌고 우리 삶을 책임진다고? 저 덜떨어진 소리들이 현대 정치의 산물이라고? 그들이 착각하는 지위는 우리 중에 누가 주었을까? 표현은 무식하고, 팩트는 부정확하며, 바닥에 닿을 만큼 격이 낮은데 좋다고 박수치는 이들은 또 뭐지? 그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무슨 이유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나 하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니 그 정치인으로부터 시민사회를 되찾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들은 공공 기물 파손하듯 태연하게 언어와 사상을 망가뜨리고, 경멸과 비하로 국가 구조 안의 윤리를 봉인해 버린다. 말은 그가 아닌 동시에 그 사람이기도 한데 오직 정치가들만 예외이다. 그들에게 말이란 타이밍과 기회주의. 완전한 치외법권 지역에 속한다. 어떻게 이렇게 희비극적이고 비정상적인 감각만 남았을까? 그들은 사회의 지성이 어느 정도 바닥인지 알게 해주고 싶은 걸까? 한국 사회가 언어의 종말을 지켜볼 최적의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걸까?
우리는 다 어렸을 때 웅변의 아름다움에 대해 배웠다. 우리가 아는 멋진 연설은 땡볕 내리쬐는 운동장에 학생들을 세워놓고 일사병으로 쓰러지게 만들던, 하나마나 한 교장선생님 훈시 속에 있지 않았다.
말을 잘한다는 건 말을 늘어놓는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 언어란 팩트를 전하는 순기능 말고도 운율의 아름다움, 이미지의 서정성, 발음이 혀에 미끄러지는 순간의 질감, 개인적 박물관을 드러내는 사색도 같이 전하니까. 그렇지만 말이 안 되는 말로 떠벌리는 소음의 괴로움… 모든 것이 돌고 돌아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 새로운 정치 언어는 보이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발음하는 ‘새로운’ 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지고 그야말로 텅 빈 말이 되었기 때문에. 언어의 돔이 열리는 순간, 이성을 잃고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유도 미사일의 정확도로 언어를 사용했지만, 치명적인 화살보다 썩은 토마토 같은 말을 발사할 때 더 유치한 기쁨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고 의미도 없는 모욕적인 말을 한껏 즐겼다. 셰익스피어도 그럴진대 법의 제재로부터 안전한 면허를 등에 업고 거짓말을 능숙하게 떠벌리는 것쯤이야.
성서는 등장 인물들을 프로이트식 정밀 조사 대상으로 정한 에세이 모음집 같다. 노아의 나체와 함의 저주 같은. 그렇다면 히브리의 말더듬이 모세는 리더십에 있어 연설의 결함을 은유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데모스테네스라는 그리스 웅변가는 발음이 너무 불분명해서 몇 달 동안이나 자갈을 입에 담고 발성 연습을 했다. 호흡을 늘이기 위해 경사가 급한 언덕을 달리다가 숨이 가빠지면 바로 연설을 했다. 또 말할 때마다 왼쪽 어깨를 드는 습관을 고치려고 어깨 위에 칼을 매달고 연습했다. 나이 베번이라는 영국 연설가도 말을 더듬었는데 매일 밤 대용어를 찾으며 유의어 사전을 공부했다. 덕분에 어휘력이 아주 풍부해졌다. 한국 정치인들도 성문종합영어를 공부하던 기세로 어휘 공부를 한다면 자기들도 덜 답답했을 것을. 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쩌면 위선적인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들 자체가 구시대적으로 옳은 모습인 탓에.
1984년, 미국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한 번도 국가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던 지역 세력가가 대중을 압도하는 연설로 단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리오 쿠오모는 미국을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로 묘사하며 디즈니풍 판타지를 내세운 현직 의원 로널드 레이건에게 응답 연설을 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프라이버시와 정부의 개방성을 믿습니다. 우리는 시민의 권리를 믿고, 인간의 권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믿습니다. 상호성. 모두의 복지를 위해 이익과 부담을 함께 공유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연설의 요지는 도시의 성취와 화려함이 모두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달라진 지금의 감각으로 그 날의 이야기를 꺼내면 쿠오모의 말에 동의할 수도 동의 안 할 수도 있다. 웅변 능력이 정치력의 우선 순위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이 드러내는 강인함에는 지금도 저항할 수 없다. (정치가이면서 정치 혐오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위악이 마음에 든 탓인지 모르겠다).
마틴 루터 킹이 1963년 링컨 기념일에 한 연설을 좀더 세밀하게 뜯어보면 감상적인 호소 말고 다른 것이 있다. 그의 문장에는 짧은 것부터 긴 것까지 주의 깊게 장치된 핵심이 있었다. 그는 “백 년 뒤에”란 말을 반복해서 네 번이나 했다. “차별의 연결 고리”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또 시민의 권리가 왜 지켜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거듭 “지금”이란 단어를 썼다. 물론 그의 연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절정을 맞지만. 그의 소원은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성품으로 판단 받는 것이었고, 그의 두운법은 가장 빼어난 연설의 상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나는 피와 고름과 눈물과 땀 말고는 제공할 것이 없다”던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 스타카토식 은율이 있는 화법이 어떤 식으로 말에 강렬한 힘을 부여하는지 알 수 있다. 그 자신을 연설가로 자리잡게 해준 것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다.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한 스피치는 강렬하고 명료하며 본능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도덕적 감성과 강력한 감정을 피력해야 한다는 것을. 전문적인 섬세함, 정확한 팩트 위에 설복의 힘을 갖춘 언어, 유머와 억양을 갖춘 말이라면 입만 터는 애국주의에 기꺼이 맞설 것이다.
국회의사당이 국가적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극장이라면 파멸의 말들로 그을린 가면의 정치가만 한 장관(壯觀)도 없다. 이때 그들이 하는 말은 무대 위를 살아온 시간대가 우리와 비슷하다 해도 같은 시간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어휘의 체계며 단어의 용례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즉 정치가들이 이해하는 ‘내일’은 우리가 아는 내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정의하는 ‘유권자’는 분명 정치인들의 고용주인데, 그들이 생각하는 유권자는 자기들의 지배를 받는 종복인 것이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역사는 개인의 추상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획득이며 세월에 걸친 시민 규율의 결과니까. 그리고 곱씹게 되는 현대의 삶 속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게 해주니까.
이전 역사처럼 우리의 역사에도 마지막은 올 것이다. 새 문명이 시작되면 미래 인간은 이 시절의 타임 캡슐을 꺼내 요즘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며 한참 혀를 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언어는 남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말의 무서움을 몰랐구나. 기회주의로만 말을 한 대가로 존재 이유를 잃고 말았구나, 하고.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