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웠던 고대 연맹왕국 가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경남 김해에 요즘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선뜻 역사 공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청년 작가들로 활력이 넘치는 ‘봉황대길’, 이국적인 거리 ‘동상동-종로길’, 가야의 숨결과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가야길’ 등 김해시만의 특색 있는 거리가 온ㆍ오프라인으로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져서다.
이 거리들은 김해시가 지역문화에 뿌리를 두고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 원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의욕적으로 시작한 재생사업 '원도심 스토리투어'의 결과물이다. 3개 거리 모두 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원도심을 누비며 가야문화의 정수와 원도심 매력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됐다.
무엇보다 이 거리들은 가야 유적에 도시재생을 접목한 것이 특징이다.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 500년 수도 김해시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문화재나 다름 없을 정도로 유적·유물이 많아 이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가야의 숨결과 정취는 물론 젊은 감성과 이국적인 분위기도 느낄 수 있는 이 거리들을 찾아가 봤다.
서울에 이태원 '경리단길'이, 경주에 '황리단길(황남동+리단길)'이 있다면 김해 원도심에는 '봉리단길'이라고 불리는 '봉황대길'이 있다.
원도심 회현동(봉황동)에 위치한 '봉황대길'은 경전철 봉황역에서 이어지는 골목길이다. 금관가야시대 집단 취락이 있었고, 가야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모여 이룬 조개무지가 발견된 인근 '봉황대(鳳凰臺)'라는 구릉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폭 6m 남짓한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기와집과 양옥이 늘어선 봉리단길은 원래 ‘신의 거리’라고 불렸던 점집골목이었다. 직선거리로 500m가량 떨어진 곳에 가락국의 초대 국왕인 김수로왕과 왕비의 능이 있어 봉황동의 터와 기가 좋아 점집이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런데 빈 점포가 하나둘 늘어가며 분위기가 을씨년해졌던 지난 2016년.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여 골목길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주민과 상인으로 구성된 사업주민협의회가 가로환경 개선을 위해 길이 1.7㎞ 골목길을 따라 들어선 가게에 간판 및 파사드, 입면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청년들은 개성넘치는 카페나 식당을 열어 새 상권을 만들고, 문화예술 기획자들이 라이브 공연 등 작은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덕분에 회색골목은 삽시간에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김해의 대표거리'로 급부상했다. 아직 곳곳에 점집도 있어 점집골목의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봉리단길에 활력을 불어넣은 데에는 예술인들의 공이 컸다. 단연 눈길을 끄는 곳은 주택과 마당을 개조해 만든 '회현종합상사'. 화가와 디자이너, 가수 등이 '재미난사람들협동조합'을 꾸려 음식점과 옷가게, 카페 등 6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옥상에는 영화관을 만들어 주민들과 어울림마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혜련(49) 회현종합상사 대표는 "2017년 지역주민들과 재미있는 활동을 만들기 위해 봉리단길 입주를 결심했다"며 "옥상 영화제와 소소한 파티와 문화공연 등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사업주민협의회를 중심으로 끈끈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원도심에 젊음의 색채를 입혀 김해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데에는 주민들도 기여했다. 사업주민협의회는 '소소하고 정겨운 거리 만들기'라는 주제로 △소소한 문화제 △리마인드 웨딩 △거리축제 △크리스마스트리 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주민 공동체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인근 신도시로 내국인들이 떠나 쇠퇴한 원도심은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현재 김해시에 등록된 다문화가족이 3,683가구에 1만1,101명에 달한다.
특히 주말이면 부산, 창원, 양산 등 인접 지역에서 외국인들도 찾아오는 원도심 내 동상동의 동상시장과 종로길 구제옷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에 따라 원도심 주민과 이주민의 화합, 지역 문화다양성 함양에 중점을 둔 원도심 도시재생사업도 진행 중이다. 주민과 이주민 화합의 거점은 준공을 앞둔 다(多)어울림광장과 다(多)어울림센터다. 다(多)어울림광장에선 선주민과 이주민 대상 행사를 열고, 다(多)어울림센터는 내·외국인 문화포럼, 아시아외국어학교, 동네진료실 등을 운영하며 문화다양성을 포용한다.
구제옷 가게들이 주를 이룬 400여m 골목길도 업소 63곳의 간판을 말끔히 단장하고, 골목길에 늘어선 전봇대에는 베트남·태국 등 김해 내 많이 거주하고 있는 8개국 대표 명소를 디자인해 '다문화거리'의 정취를 더했다.
구제옷 가게 맞은편에는 외국인 상점과 음식점 30여 곳이 늘어서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김해의 이태원'이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베트남,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의 대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식료품마트에서 각국에서 공수된 현지 제품도 구매할 수 있다.
종로길 상인과 주민이 모여 결성한 종로길 사업주민협의회도 2019년 주민과 이주민이 어우러질 수 있는 '김해 구제 패션축제'를 구제옷 거리에서 개최하는 등 화합에 힘을 쏟고 있다.
경전철 봉황역에서 수로왕릉역을 거쳐 박물관역까지 2㎞가량 이어지는 '가야길'은 가야 왕도 김해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건설교통부 아름다운 길 100선, 경남도 언택트힐링관광 18선에 이름을 올린 김해의 대표적인 걷고 싶은 길이다.
출발점인 봉황대 유적공원은 2,000년 전 가야시대 수많은 외국 선박이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인근 해반천을 따라 이어지는 가야길은 가야시대 고상가옥, 망루, 배 등이 실물처럼 재현돼 있다. 봄철에는 다랭이청보리밭도 만날 수 있다.
길을 걷다 대성동고분박물관과 대성동고분군(사적 341호)에 들러 가야 역사탐방을 하고, 걷기가 피곤하다면 길 중간에 공영자전거 '타고가야'를 이용해도 된다.
대성동고분군 뒤편의 널찍한 녹지공간은 시민들과 관람객들의 소풍장소로 제격이다. 김해의 대표적인 행사도 모두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길 양쪽에 잘 조성된 가로수와 조경들 못지 않게 기마민족상징 조형물과 기마체험 공간 뿔잔을 본떠 만든 각배 분수대, 가야토기를 형상화한 시민의 종, 춤추는 시계탑 등을 만날 수 있어 자연스레 가야 역사탐방을 할 수 있다.
이들 3개 코스는 모두 경전철역을 끼고 있는데다 서로 자연스레 연결돼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고, 처음 오는 외지 관람객들도 길을 잃지 않는 편이다. 힐링과 역사탐방, 쇼핑과 먹거리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김해 스토리투어길은 신도시의 화려함보다는 투박하면서도 정겨움과 소소함이 묻어 있는 원도심의 매력을 살려 도시재생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김정준(34) 김해도시재생지원센터 재생사업팀장은 "원도심 재생사업은 주민 주도 공동체사업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지향하고 있다"며 "이제 막 뿌려진 도시재생의 씨앗이 사업 종료 후에도 싹을 틔워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