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신에게 맡겼습니다"

입력
2021.04.05 04:30
24면
Dianna Ortiz(1958.9.2~ 2021.2.19)

냉전기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명실공히 이념의 전위 부대였다. 반공-자본주의 이념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지만 그들이 지키려던 알맹이는 자본과 국익이었고 방패이자 대리권력인 현지의 우파 독재 권력이었다. CIA 공작은 집요했고 꼭두권력의 행패는 우악했지만, 그들은 인도차이나에서 결정적으로 패했고, 중동에선 시종 허우적댔고, 중남미에서도 심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컬럼비아대 정치사학자 존 코츠워스(John H. Coatsworth)에 따르면, 1898년 쿠바 등 식민지를 두고 벌인 미국-스페인 전쟁 이래 약 100년 간 미국은 총 41차례, 28개월마다 한번 꼴로 라틴아메리카 정권 전복에 개입했다. 17차례는 군대와 정보기관을 투입한 적극적인 작전의 결과였고, 24번은 현지 권력을 부려 이룬 성과였다. CIA는 1947년 창설 이후 24차례 군대를 동원(4건)하거나 암살과 쿠데타로(20건), 63년 선거로 수립된 볼리비아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정권과 도미니카 후안 보슈(Juan Bosch) 정권, 64년 브라질 주앙 굴라르(Goulart) 정권, 73년 칠레 아옌데 정권 등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옹립했다. 막대한 달러와 무기로 불의의 권력을 부축하며 백색 테러 등 국가폭력을 묵인-방조했다. 70년대 칠레-아르헨티나 등에서 광역적으로 벌인 '콘도르 작전'이 대표적인 예였다. 당시 미국 시민 대부분은 자신들의 세금이 저렇게 쓰인 사실을 몰랐다.

미 CIA의 중남미 공작의 신호탄

약 50년간 중남미 거의 전역을 내전상태로 몰아넣은 신호탄이 된, CIA의 라틴아메리카 첫 비밀 작전이 1952년 트루먼 당시 대통령의 승인 하에 시작됐다. 과테말라 아르벤스(Jacobo Arbenz) 민선 정부 전복을 위한 'PBSuccess(PBHistory) 작전'이었다. 과테말라는 19세기 중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미국 자본의 텃밭 즉 '바나나공화국'이었다. 유나이티드프룻컴퍼니 등 거대 농업 자본은 대규모 토지와 노동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1940년대엔 현지인 5,000여 명을 상대로 매독 생체실험까지 벌였다. 아르벤스는 다국적 기업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준다는 개혁 공약으로 1950년 선거에서 승리했고, 곧장 공산당을 합법화했다.
CIA는 니카라과 소모사, 도미니카 트루히요 등 주변국 우익정권과 공모해 아르벤스 정권을 군사-경제적으로 고립시키며 좌파 군인과 정치인들을 노린 암살단(K그룹)을 가동했고, 친미 망명 정치인 아르마스(Carlos C. Armas)를 앞세워 사보타주와 내전, 쿠데타를 도모했다. 53년 집권한 아이젠하워도 그 작전에 박차를 가했고, 국무부도 CIA와 완벽히 공조했다. 당시 국무장관이 유나이티드프룻컴퍼니의 고문변호사 출신인 존 포스터 덜레스였고, CIA 국장이 그의 동생인 앨런 덜레스였다. 54년 쿠데타로 아르벤스는 망명했고, 권력을 꿰찬 친미 정권은 광기의 테러를 자행했다. 1960년 내전이 시작됐다.
첫 작전의 깔끔한 성공에 고무된 미국 정부와 CIA는 메카시즘 의회의 전폭적 지원 속에 작전지역을 남미 전역으로 확장해갔다. 과테말라 개혁 정권의 참담한 패퇴를, 과테말라인 아내와 함께 현지에서 지켜본 26세의 의사가 60년 쿠바혁명의 주역 체 게바라였다.

십자가도, 미국 여권도 소용 없었다

미국 가톨릭 '우르술라 수녀회(Ursuline Sisters)' 소속 만 29세 수녀 다이애나 오티즈(Dianna Ortiz, 1958.9.2~2021.2.19)는 1987년 과테말라 서부 우에우에테낭고(Huehuetenango)주 산미겔(San Miguel) 농촌 마을로 이주, 마야족 아이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했다.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17세에 켄터키 주 성요셉 에이플마운트 수녀원에 들어 견습-수련 과정을 거친 그는 빈민, 특히 여성 교육을 주된 소임으로 삼은 수녀회의 충실한 일원이 되고자 오언즈버러(Owensboro)의 브레시아 가톨릭대학서 유-초등 교육학 학위도 받았다. 내전 양상은 당시에도 격렬했고, 그가 부임한 마야족 오지 마을은 내전의 최전선이었다. 잦은 쿠데타로 권력자는 수시로 바뀌었지만 우파 정권의 내전 전략은 한결같았다. 암살, 살인, 집단학살, 강제연행과 고문. 만 36년 내전기간 동안 약 20만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대부분 국가가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일방적인 학살의 희생자였다.

오티즈에겐 십자가만큼 든든한 방탄의 갑옷, 미국 여권이 있었고, 그도 "위험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88년 말 오티즈가 반군과 연루돼 있다는 익명의 투서가 주교청에 날아왔고, 이듬해엔 섬뜩한 협박편지도 전해졌다. 거처를 옮겨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오티즈는 집요한 미행에 시달리던 끝에 89년 10월 안티과의 한 피정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1월 2일, 피정의 집 뜰에서 정복 경찰관 두 명에게 연행돼 인근 '안가'로 끌려갔다. 연행 사유도 장소도 공개되지 않은, 강제 납치였다.

오티즈는 만 24시간(가톨릭신문에 따르면 약 30시간) 갇힌 채 최소 3명에게 집단강간을 당했고, 심문 당하며 담뱃불로 등을 111차례 지져졌고, 숨져가는 이들과 숨져 부패한 시신들이 한데 엉킨 구덩이 위에 매달렸고, 맹견과 쥐를 동원한 위협도 당했고, 끌려온 다른 여성을 마체테(정글칼)로 찔러야 하는 가학의 고문까지 겪었다. 고문자들은 킬킬대며 저 과정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뒤늦게 나타난 '알레한드로(Alejandro)'라는, 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멍청이들아(Idiots), 미국 여자잖아... TV뉴스에 벌써 난리가 났어"라며 납치범들을 꾸짖으면서 고문은 멈췄다. '알레한드로'는 기진한 오티즈의 옷을 입히고 차에 태워 '미국대사관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차에서 그는 오티즈에게 '동명의 게릴라(Veronica Ortiz Hernandez)와 오인한 탓'이라며,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하면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입막음을 위해 자기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오티즈는 신호 대기 중이던 차에서 뛰어내려 인근 상인의 도움으로 피신했다. 그는 현지 바티칸 대사관에서 변호사 입회 하에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린 뒤 이틀 만에 귀국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족조차 못 알아볼 만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은 그는 시카고의 비영리 고문 피해자 치유기관(Marjorie Kovler Center)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 자신이 겪은 일을 언론에 알렸다. 과테말라 치안 당국과 국방부장관을 고소했고, 미국 정부와 현지 대사관을 상대로 '알레한드로'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오티즈는 '알레한드로'의 스페인어 말투에 미국 억양이 뚜렷했고, 단 둘이 있을 땐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체형도 외모도 전형적인 앵글로색슨이었고, 납치범들의 리더였다는 점을 부각하며, 턱수염에 파일럿 선글라스를 쓴 그의 몽타주를 공개했다. "가공의 존재가 아니다. 이 자는 실제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현지 미국 대사관의 "납치 호소인"

과테말라 정부는 "여성 동성애자가 가학-피학의 밀회를 변명하고자 조작한 판타지"라고 일축했다. 미국 현지대사관측도 오티즈를 '납치 호소인(allegedly kidnapped)'이라 부르며 한마디로 '사기극(hoax)'이라 주장하는 전문(電文)을 본국에 보냈다. "스페인어도 미숙한 사람이 강도 높은 고문을 당하며 24시간 잠도 못 잔 상태로 내린 판단(알레한드로가 미국인이었다는 주장)"이라며 의혹을 제기했고, "말도 못할 만큼 쇼크 상태였다면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나 보다"라고도 썼다. 당시 대사였던 토마스 스트루크(Thomas F. Strook)는 1995년 인터뷰에서도 "수녀를 납치-고문한 건 우파 민병대였다"고 주장했다.

국가권력을 비롯한 사방의 2차가해에도 오티즈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미국 비영리 법률지원단체인 '헌법권리센터(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와 함께 92년 매사추세츠 주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연수 중이던 89년 당시 과테말라 국방장관 그라마호(Gramajo)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고문피해자보호법' 즉, 고문 관련자가 국내에 있을 경우 피해자가 소송을 걸 수 있게 한 법의 첫 소송 사례였다. 과테말라 출신 등 8명이 함께 원고로 나선 그 소송에서 95년 보스턴 연방지방법원은 피고의 고문 책임을 인정하고 원고에게 각각 100만~900만 달러씩 총 4,75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라마호는 이듬해 항소도 않고 본국으로 도주했고, 원고들은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그라마호는 2004년 현지 자신의 아보카도 농장에서 살인벌떼(killer bees)에 쏘여 숨졌다.

판결이 난 뒤에도 2차가해는 끊이지 않았다. ABC방송 TV토크쇼 '나이트라인'의 진행자 코키 로버츠(Cokie Roberts)는 96년 오티즈와 인터뷰하며 그의 주장을 허구라고 몰아세웠다. 과테말라 권력은 이미지 세탁과 국가 로비에 많은 돈을 썼고, 자문 로펌이던 'Patton Boggs'가 로버츠 일가의 것이었단 건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다.

미국헌법과 정보자유법(FOIA, 1966)이 보장한 공공정보 시민열람권에는, 안보 첩보 외교 프라이버시 등 수많은 예외조항이 있다. CIA 작전 정보가 대표적인 예다. 저널리스트인 국제문제전문가 스티븐 슐레징거(Stephen Schlesinger)가 CIA의 54년 과테말라 쿠데타 개입 실상과 후유증을 고발한 책('Bitter Fruit', 1982)을 쓰면서 자료 공개를 요구했지만 CIA는 단 한 쪽도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고, 소송 심판을 맡은 연방법원도 84년 CIA 편을 들었다. 90년 오티즈의 정보공개 요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티즈는 타당성 조사 과정에서 굴욕감 등 2차가해를 겪었고, 법무부는 '요구 근거가 부족하다'며 파일을 덮었다.

1990년 과테말라의 미국인 마이클 드바인(Michael DeVine)이 우익 테러로 살해당했다. 미국인 저명 인권변호사 제니퍼 하버리(Jennifer Harbury)의 남편이던 반군 간부 에프라인 바마카(Efrain Bamaca)도 92년 납치 실종됐다. 오티즈는 96년 4월, 하버리 등과 함께 백악관 앞 광장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5주간 단식과 일주일 여의 철야시위. 160cm 키에 체중 45kg였던 오티즈의 몸무게는 무려 11kg이 더 빠졌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대통령 부인이 오티즈를 만나 도움을 약속했다.

추한 진실의 일부가 마침내 드러나다

96년 5월, 총 18만 페이지 분량의 CIA 중남미 작전 기록 중 약 2만 페이지가 비로소 공개됐다. CIA의 추악한 역사의 일부가 그렇게 최초로 공식 문서로 확인됐고, 의회의 태도도 달라졌다. 중남미 공작의 비밀들이 고구마 넝쿨처럼 끌려 나왔다. 99년 빌 클린턴은 국가 개입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오티즈도 약 1,000쪽 분량의 자료를 넘겨 받았다. 하지만 정작 '알레한드로' 관련 부분 3페이지는 온통 먹줄로 지워진 채였다.

오티즈는 98년 '고문 근절 및 생존자 지원 연대'(TASSC)라는 단체를 창설해 이끌었다. 강간당해 임신한 태아를 수녀인 그가 낙태한 일까지 고백한 자서전 '가려진 눈: 고문 진실을 향한 나의 여정(The Blindfold's Eyes: My Journey from Torture to Truth, 2002)'을 출간했다. 분쟁-차별 지역 교육 지원사업을 위한 가톨릭 국제 '정의교육센터'와 국제 반폭력 평화운동기구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에서 암 발병 직후까지 일했다. 그가 2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62세.

90년대 한 기자회견에서 오티즈는 "내 죄는 마야인 아이들을 읽고 쓸 수 있게 가르친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사실 그 '죄'야말로 피억압자의 눈을 한사코 가려야 했던 이들에겐 방치할 수 없는 '죄'였을 것이다. 고문과 트라우마, 진실을 향한 긴 여정에서 맞닥뜨린 의심과 편견과 조롱보다 오티즈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자신의 신앙이 이상으로 삼는 '용서'의 숙제였다. 96년 4월 NPR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용서를 신에게 맡겼다. 용서하지 못하는 가톨릭 수녀라는 사실이 가장 죄스럽다. 용서란 게 무슨 의미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