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위해 왜 죽냐” 실낱 같던 믿음마저 저버린 아버지

입력
2021.03.29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10년간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준비 중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준비하면서 부모님과 불화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희 가족은 화목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보증 사기를 당하고 매일 술을 마셨어요. 술 취한 아버지는 식탁에 식칼을 내려 꽂으며 “너희만 없었으면 사기꾼을 찾아 죽일 텐데”라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아버지는 친할머니와도 매일 싸우고 어머니와도 자주 싸웠어요. 당시에 어머니가 등산을 자주 가셨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외도를 의심했고, 두 분이 싸우면 매번 이혼 얘기가 나왔습니다. 어린 저와 제 동생에게 “이혼하면 누구랑 살래”라며 윽박지르기도 했어요. 술에 취해 저희를 몇 시간씩 깨워 앉혀놓고 “널 위해 죽어줄 수 있다”는 말을 세뇌시키듯 했습니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을 것이라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스물넷에 집에서 나왔어요. 당시 제가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모은 1,000만 원을 부모님이 저와 상의도 없이 쓰면서 크게 다퉜습니다. 부모님은 “잠깐 쓰고 채우려 한 건데 뭐가 잘못됐냐”며 오히려 화를 내셨고, 저는 돈을 돌려받고 앞으로 혼자 알아서 살겠다고 말한 뒤 집에서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저와 여자친구 둘만의 힘으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자친구 부모님이 경제적 지원을 해주셔서 부모님께도 “결혼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냐”고 한번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라”라고 했고, 어머니는 “네가 결혼이고 뭐고 알아서 산다면서 왜 이제 와서 돈을 달라고 하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결혼을 부모와 상의 없이 했다고 하면서 “결혼은 너네끼리 하느냐” “예단은 안 해도 아버지 양복은 해줘야 한다”며 저와 여자친구에게 뭐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돈을 안 받더라도 해드리려던 한복과 양복, 선물 계획을 완전히 접고 싶었어요. 답답한 마음을 말했다가 아버지는 화를 냈고, 저도 참지 못하고 막말을 하며 크게 싸웠습니다.

여러 상황으로 결혼은 계속 미뤄졌고, 최근에 자식 된 도리로 다시 연락을 드리고 찾아갔습니다. 부모님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으셨어요. 어렸을 때 술 취한 아버지가 반복했던 그 말이 생각나 “지금도 저를 위해 죽을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내가 왜 널 위해 죽냐”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 말은 절 완전히 죽이는 것이었어요. 저도 “차라리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심하게 말하고 뛰쳐나왔습니다.

그 후에 제가 한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전화로 사과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생신 즈음이었는데, 두 분은 제 전화번호도 지워버렸는지 “넌 줄 몰랐다”라며 목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대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이런 제가 속이 좁은 걸까요. 결혼할 여자친구 볼 면목도 없습니다. 저라도 제 부모와 같은 부모를 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민우(가명ㆍ31세ㆍ회사원)

민우씨, 아마 당신의 사연을 읽은 독자들은 “아니, 왜 그런 부모랑 아직도 단절하지 않았어요”라며 답답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는 너무 중요하고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부모와 쉽게 인연을 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당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늘 다시 연락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반응은 매몰찼어요. 저는 당신 내면의 그 깊은 갈등과 마음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아버지는 보증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가족과 갈등이 심화됐던 것 같아요.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게 기폭제가 돼서 술 문제로까지 이어졌어요. 당신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술 문제로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많아요. 아버지는 술에 취해 가족들과 다투고, 식탁에 칼을 꽂는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어머니를 때리고, 거친 말을 쏟아내고, 술주정을 했어요. 반면 아버지와 좋았던 기억은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는 자녀들과 정서적 교류나 대화다운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부모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자길 낳아준 부모와 배우자, 자녀 등 가까운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갈등이나 위기 상황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데도 어려움이 컸을 겁니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갈등이 많이 생깁니다. 같이 살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고, 위기나 큰 일을 함께 겪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데 어려움이 있었던 아버지는 위기를 술로 해결하려고 했어요. 술을 먹고 가까운 사람에게 버럭 화를 내고 자신이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을 부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어머니도 삶이 힘드셨을 거예요.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본인의 삶이 힘들다는 점에 사로잡혀서 부모로서 자녀에게 베풀어야 할 기본적인 사랑을 줄 여력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지키는 데에만 너무 몰두하고, 언제나 자기가 가장 중요했을 거예요. 어릴수록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우리 부모한테는 가장 소중한 대상으로서 대해지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민우씨는 부모로부터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지는 느낌을 받아보질 못했던 것 같아요.

민우씨, 사람은 누구나 부모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어요. 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깊은 상처로 남고, 이 상처는 건드려질 때마다 삶을 뒤흔드는 너무 큰 갈등 요소가 됩니다. 숨은 쉬지만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죠. 술 취한 아버지가 “너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다”는 그 말은 당신에게는 썩은 동아줄과 같은, 하지만 그거라도 잡아야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거예요. 술에 취했어도 본능적으로 나를 사랑해서 하는 얘기라고 말이죠. 그거라도 믿지 않으면 당신은 버틸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내가 널 위해 왜 죽냐”고 반문했을 때 당신이 받은 그 상처가 굉장히 컸던 거예요. 그 썩은 동아줄로 당신이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부인해버리니 당신으로서는 얼마나 상처가 깊고 힘들었겠습니까.

민우씨의 부모는 당신 탓을 했어요. 가족 간의 갈등 상황에서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보증 사기를 당하고, 술 먹고 행패를 부리는 그 모든 상황은 당신이 저지른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너 때문에 사기를 당했다”라고는 안 했어도 아주 묘하게 “너희 때문에 내가 사기꾼을 죽이지 못한다”는 식으로 어린 자녀에게 책임을 미뤘어요. 누구나 살아가면서 실수를 합니다. 실수를 저지른 과정을 잘 돌이키고, 그 과정에서 자각을 하고, 자각을 통해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요. 그렇지 않으면 항상 똑같은 패턴의 삶이 이어집니다. 매번 화를 내고, 남 탓을 하죠.

민우씨의 부모는 집안의 갈등 상황에 대해 “우리가 신중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고, 잘 대처하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자녀에게 책임지는 모습보다는 “그 사기꾼을 죽여야 하는데, 너네 때문에 그걸 못해서 분하다”는 식으로 잘못한 게 하나 없는 자식에게 분풀이를 했어요. “이혼하면 누구랑 살래”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도 굉장히 무책임합니다. 이혼한 부모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은 자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린 자녀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의 결정을 그냥 떠넘기고 강요했어요.

저는 두 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한다고 했던 많은 것들이 자녀를 편안하고 건강하게 키우는 과정을 돕는 방법이 아닌 경우도 많아요. 그걸 민우씨의 부모는 깨닫지 못하고 몰랐을 겁니다.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해서 당신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전혀 몰라요. 그래서 늘 당당하고 떳떳했을 거예요. 당신이 힘들게 번 돈을 아무 말도 없이 썼을 때도 '상황이 이렇게 돼서 쓰게 됐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게 부모가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이에요. 형편이 어려운 부모에게 돈을 왜 못 주겠습니까. 줄 수 있지만 가족으로서 존중받고, 자녀로서 소중하게 대해지는 그 중간 과정이 싹 빠져버렸어요. 너무 당당하게 자기 돈처럼 쓰면서 민우씨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거지요.

부모로부터 그렇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당신은 매번 부모에게 당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서 태어나서 컸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부모가 당신을 어떻게 대하더라도 당신은 인간적 도리를 다하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부모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던 거죠. 부모가 고마워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리를 다하는 인간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민우씨, 당신은 부모로부터 확인을 받지 않아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 그 자체로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예요. 당신이 자꾸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연연해하면 번번이 지금과 같은 상처가 반복될 수 있어요. 다만 당신 마음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 자식의 도리로 부모에게 잘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 당신의 마음을 따르세요. 부모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주느냐보다 당신 마음이 그렇게 했을 때 편하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당신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고, 내면의 힘도 길렀어요. 직업도 있고,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맺을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할 힘도 있어요. 민우씨에게 결혼은 진정한 독립의 선을 긋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결혼은 당신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겁니다. 가정이 생기면 소중한 사람과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대화하면서 의논하고, 좋은 추억과 기억이 남게 하는 그런 남편, 가장, 아버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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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