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삶 원하던 ‘파티맘’은 두살 딸을 죽였을까

입력
2021.03.26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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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美 '파티맘' 살해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2008년 7월 15일 저녁, 미국 플로리다주(州) 올랜도 오렌지카운티 보안관실로 전화를 건 신디 앤서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손녀의 모습이 한달 째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딸의 망할(damn) 차 안에서 시체가 있던 것 같은 냄새가 나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두 살배기 외손녀, 케일리 마리 앤서니가 사라졌다. 6월 16일 딸 케이시 앤서니(당시 22세)가 케일리를 데리고 1시간30분 가량 떨어진 탬파로 떠난 이후 신디와 남편 조지는 단 한번도 손녀의 커다란 갈색 눈을 볼 수도, 천진한 웃음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부부가 손녀를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케이시는 “일이 너무 바쁘다. 내일 얘기하자”거나 “베이비시터와 놀러 갔다”고 둘러댔다.

막연한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됐다. 한 달이 지난 7월 15일 딸이 잠시 올랜도를 방문했을 때다. 딸의 차 트렁크를 지나치던 아버지 조지의 코 끝에 역한 냄새가 스쳤다. 전에 없었던 일이다. 혼자 돌아온 딸, 그리고 차에서 나는 의심스러운 냄새. 고심 끝에 신디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손녀가 사라졌다고. 미국사회를 들썩이게 한 ‘파티맘 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젊은 미혼모에 쏟아진 의심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신고 이튿날 경찰은 엄마 케이시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했다. “딸이 베이비시터에게 납치 당했다”는 케이시의 항변에도 모든 정황은 그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행동이 특히 수상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사라지면 백방으로 수소문하거나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을 터. 그러나 젊은 엄마는 한달 동안 한 차례도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트클럽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거나, 심지어 몸매가 뛰어난 사람을 뽑는 ‘핫바디 콘테스트’에 참가한 사실이 주변 증언으로 밝혀졌다. 또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겼고, ‘아름다운 인생(Bella Vita)’이라는 글귀의 문신도 새겼다.

도덕적 편견도 엄마를 범인으로 모는 데 일조했다. 케이시가 고교를 중퇴한 뒤 19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딸을 임신한 점, 나이트클럽에서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샷걸’로 일한 점 등이 그랬다.


석 달 뒤인 10월 14일 오렌지카운티 검찰은 케이시를 1급 살인, 위증, 아동학대 등 7개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유죄입증을 자신했다. 각종 과학수사 기법을 동원한 덕분에 증거는 차고 넘쳤다. 제시한 증거만 400개, 수사 문서는 700쪽에 달했다.

일단 차량 안 악취는 시신이 부패할 때 나는 것이 맞았다. 공기 샘플을 분석한 법의학 전문가의 견해였다. 차량 바닥에서 모근 색깔이 변한 머리카락 한 가닥도 발견됐다. 모근 변색은 시신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밖에 케이시의 삭제된 컴퓨터 검색기록을 복구했더니 그가 ‘클로로포름’과 ‘목 부러뜨리기’를 수 차례 검색한 정황이 나왔고, 실제 차량 트렁크에는 다량의 클로로포름이 들어 있었다.

실종 실종 6개월 뒤인 그 해 12월 15일 케일리는 집에서 겨우 400m 떨어진 숲에서 발견됐다. 검은색 쓰레기봉투 안에 담요로 둘러싸인 시신은 연조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다. 두개골 바로 옆에는 주로 배관공들이 사용하는 15~20㎝ 길이의 덕테이프(공업용 테이프) 3장이 놓여 있었다.

검찰은 케이시가 클로로포름으로 딸의 의식을 잃게 한 뒤 덕테이프로 기도를 막아 질식사시켰을 것으로 봤다. 테이프 한쪽 구석에 붙어있던 분홍색 하트모양 스티커와 현장에서 발견된 담요 역시 조부모 집에 있던 것과 일치해 엄마가 범인이라는 가설에 힘을 보탰다.

2009년 4월 13일 검찰이 케일리에게 사형을 구형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제프 애쉬튼 검사는 2011년 7월 4일 재판 최종 논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당신의 인생이 된다. 이 사건은 (부모로서의) 책임과 그에 따르는 기대, 그리고 케이시가 추구하던 삶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부모는 원하는 삶과 책임져야 하는 삶,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데 엄마는 자식의 희생을 택했다.”


결정적 물증은 없었다

20대 초반 미혼모가 자유를 갈망해 어린 딸을 죽였다는 자극적 스토리는 단박에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느 새 케이시에게는 ‘파티맘’이란 수식어가 생겨났고 플로리다를 넘어 미 전역 방송사가 재판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50석으로 제한된 재판 방청권을 얻으려 철야를 불사한 이들도 속출했다.

여론 재판에서 케이시는 이미 유죄였다. 그러나 7월 6일 올랜도 법원에 모인 12명의 배심원단은 보기 좋게 1급 살인 등 혐의에 무죄평결을 내렸다. 유죄가 인정된 부분은 거짓진술로 수사당국을 오도했다는 것, 단 하나였다.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형사재판에선 진실도, 도덕도 증거를 앞서지 못한다. 배심원단은 검찰 측이 제시한 대부분의 주장이 정황에 근거했을 뿐, 엄마가 딸을 살해한 합리적 범행 동기와 증거가 부족했다고 판단했다. ‘한 방’이 없었다는 의미다. 2차 부검을 실시한 법의병리학자 베르너 스피츠 박사는 “덕테이프가 처음부터 피부에 붙어 있었다면 부패 이후에도 딸의 유전자(DNA)가 남아있어야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며 케이시의 DNA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케이시의 변호사 호세 바에즈도 “품행이 단정하지 않다고 살인자로 볼 수 없다. 검찰이 증거도 없이 의뢰인을 ‘문란한 거짓말쟁이’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는 대응 논리를 폈다.

뜻밖의 평결에 여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법정 밖에 모인 수백 명의 시민들은 ‘아기 살인자’라고 외치며 항의했다. 비난이 어찌나 거셌던지 법원이 배심원 명단 공개를 미뤄야 할 정도였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러셀 휴클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 측 증거가 불충분해 무죄평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진실은 사라지고 자극만 남아

하지만 결과가 달라지면 여론의 물줄기도 바뀌기 마련이다. 대중은 금세 용의자를 성급하게 범인으로 단정지은 언론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유죄 확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미디어의 무리한 보도가 케이시를 살인범으로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정신의학자 캐롤 리버먼 박사는 ABC방송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분노는 배심원 평결이 공개되기 전 언론이 엄마를 유죄로 단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각계의 질타에도 흥미 위주의 보도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의 몸이 된 케이시가 이듬해 ‘셀프 동영상’을 찍자 언론은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그가 새로 장만한 컴퓨터와 휴대폰, 입양한 강아지 등을 주제로 시시껄렁한 얘기만 했을 뿐인데도, 여러 매체는 재판 당시와는 달라진 금발 단발머리와 노출 심한 옷차림을 한껏 부각시켰다. 숨진 딸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이후에도 유수 성인잡지 ‘허슬러’의 사주 래리 플랜드가 케이시에게 누드 화보 촬영을 제안했다는 전언, 엄마가 인터뷰 대가로 방송사에 150만달러(약 16억원)를 요구했다는 소식 등 자잘한 일상이 끊임없이 소비됐다. 2016년에는 바에즈 변호사가 케이시가 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입막음과 부족한 수임료를 이유로 그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10년이 지난 현재 진실의 퍼즐을 맞출 조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극과 흥미 만이 두 살 소녀의 억울한 죽음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도 굳이 교훈을 찾는 이들이 있다. 미국 사법시스템의 우수성만큼은 입증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유명 법학자인 앨런 더쇼위츠 하버드대 교수는 “진실은 과학자가, 윤리는 철학자가 찾는 것”이라며 “불충분한 증거를 근거로 모든 배심원이 합리적 판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케이시는 악마보다 못한 엄마일까, 아니면 미디어가 낳은 또 한 명의 희생양일까.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