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

입력
2021.03.24 18:00
26면
미국의 아시아계 혐오 범죄 규탄 시위 날 
한국에선 이주민 코로나19 강제 검사 행렬 
우리 일상 속 만연한 차별부터 고쳐 나가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나는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일 아시아계 주민 대상 혐오 범죄 규탄 시위에 참여한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의 연설을 보며, 지난해 그가 영화 '기생충'에 대한 소회를 밝힌 인터뷰가 떠올랐다. 샌드라 오는 “나 자신조차 몰랐지만, 항상 유색 인종임을 의식하고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 무대에 섰을 때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유롭지만, 난 그런 시선으로 보지 못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중산층에서 성장하고 골든글로브상을 두 번 받을 만큼 성공한 샌드라 오조차 자유로울 수 없을 정도로 인종차별은 끈질기다.

샌드라 오가 미국 길거리에서 아시아계 혐오를 규탄하던 그때 한국 대부분 지역의 코로나19 선별검사소에는 이주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8개 시ㆍ도에서 이주노동자에게만 코로나19 진단검사를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그 대열에 서 있거나, 이를 지켜본 250만 한국 체류 이주민 눈에 비친 인종차별은 미국과 얼마나 다를까.

지난해 3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개한 ‘한국사회의 인종차별 실태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법제화 연구’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은밀한가를 보여준다. 결혼이민자, 동포, 난민, 유학생, 전문직, 이주노동자, 탈북민 등 이주민 3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ㆍ면접조사 결과 68%가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인종차별을 느끼는 이유가 눈길을 끈다. 피부색이나 종교를 이유로 차별을 겪는 비율은 24%와 18%로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에서 서구의 인종차별과는 다르다. 반면 한국어 능력(62%), 말투(56%), 출신국(56%)을 이유로 느끼는 차별은 비율이 높았다. 한국 인종차별은 쉽게 눈에 띄는 생물학적 이유보다는 출신국 경제 수준이나 말투 같은 일상적 이유로 일어난다.

보고서는 한국 인종차별의 특징을 세 가지 들었다. 우선 외국인이 독자적 권리를 행사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원보증제’를 고집하는 정부 차원의 인종차별이다. 둘째, 이주노동자를 단순 노무직과 5인 이하 사업장에 주로 배치하는 ‘고용허가제’ 같은 제도적 인종차별이다. 또 종족 차이가 없어도 사회ㆍ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인종화’(racialization)하는 일상 속 인종차별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다수의 국민이 ‘한국은 인종차별과 무관하다’고 믿으며, 자신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무지하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광범위하고 은밀한 인종차별의 뚜렷한 증거가 바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코로나19 진단검사다. 최근 이주노동자 밀집 사업장에서 확진자가 늘어났더라도 그건 노동자의 잘못보다 코로나 전파에 취약한 사업장 혹은 거주 환경이 더 큰 원인이다. 또 이주노동자와 내국인이 뒤섞여 근무하는데도 이주노동자만 강제 조사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외국인’을 감염병 확산자로 낙인찍어 혐오와 차별을 확산시키고, 방역 실패 책임을 사회적 약자에게 떠넘기는 행위다. 더욱이 일부 지자체는 음성판정을 받은 후 채용을 의무화해 이주민 평등권 침해를 금지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공연히 위반하고 있지만, 인권위의 권고 말고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적극적 대처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이주민 비중은 5% 돌파가 눈앞이다. 출산율 세계 최저국이란 점을 고려하면 점점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다. 앞으로 세계적 성취를 이룬 이주민이 많아질 것이다. 한국에서 자란 ‘제2의 샌드라 오’는 세계인 앞에서 자신이 성장한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두렵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