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연루된 전직 고위 법관들에 대해 23일 처음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진 지 4년 만이자, 이 사건 관련 7번째 재판 끝에 나온 첫 유죄 판단이다. 법원은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지시한 재판개입과 헌법재판소 동향 파악 등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일부 혐의에 대해선 당시 사법부 수뇌부였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모 관계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 윤종섭)는 이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14명의 고위법관들(전ㆍ현직 포함) 가운데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은 이들 2명이 처음이다. 이민걸 전 실장은 올해 2월 연임을 포기했고, 이규진 전 위원은 2019년 1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해 두 사람 모두 현재 법관 신분은 아니다.
재판부는 이규진 전 위원에 대해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재판 독립에 반해 위법·부당한 보고서를 세 번이나 작성해 보고하게 하고, 스스로도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를 두 차례 방해하는 등 중대한 범행을 했다”고 질타했다. 또 이민걸 전 실장에 대해선 “(행정처에 비판적인 판사모임을 와해하려는) 임종헌 전 차장의 목적을 알고도, 이에 동의해 주무실장으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옛 통합진보당 관련 국회·지방의원 지위확인 행정소송 등 이규진 전 위원의 재판관여 행위 중 상당수를 유죄로 인정했다. 이 전 위원이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차장 등과 공모해 일선 재판부에 ‘행정처 의사’를 전달하고, 심의관에게 부당한 대책보고서 등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제3자가 내린 결론에 (관련 사건 재판부가) 협조하도록 해, 헌법103조가 정한 재판 독립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의 ‘헌법재판소 견제’ 목적에 따라서, 이규진 전 위원이 헌재 파견 법관에게 헌재에서 심리 중인 주요 사건의 정보·자료 46건을 불법으로 수집하고 보고하게 한 혐의도 직권남용 유죄로 인정됐다. 특히 재판부는 이들 혐의와 관련,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공모관계가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재판부는 당시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사법행정에 비판적이었던 판사 모임을 견제ㆍ제재하는 과정에서도 위법 행위가 있었다고 봤다.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이 양 전 대법원장, 임 전 차장과 공모해 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판사모임의 중복가입’을 막는 공지글을 올리도록 심의관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다만 재판부는 ‘모임 와해’ 작전을 주도한 인물로 임 전 차장을 꼽으면서 그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2019년 3월부터 두 사람과 함께 피고인으로서 재판을 받아 온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 등 현직 법관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방 전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요구에 따라 자신이 맡은 옛 통진당 지방의원 사건 심증과 판결이유를 누설한 혐의로, 심 전 원장은 옛 통진당 의원들 행정소송 항소심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도록 부당 지시한 혐의로 각각 기소됐다.
이날 법원 선고는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사법농단 재판 중 ‘첫 유죄’ 판단이다. 앞선 다른 사법농단 연루 법관 재판에선 ‘6연속 무죄’ 선고가 나왔었다. 게다가 사법농단 사태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ㆍ고영한 전 처장, 임종헌 전 차장과의 공모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선고 결과다. 사법농단 사건 검찰 수사팀은 “사법행정권자의 위헌적 재판개입 행위에 대하여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유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