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꼬마'란 이름에도 미국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5톤짜리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의 위력은 엄청났습니다. 8만 명이 즉사했고 현장을 본 사람들은 실명되거나 입에서 내장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Fat man)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도시는 사흘 밤낮으로 불탔고 총 사망자는 22만명이나 됩니다. 지금도 수십만 명의 피폭자는 물론 후손들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맞은 일본은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미국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습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대면 정상회담 상대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낙점한 배경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동맹국이지만, 최근 한미 외교·국방장관(2+2)과 미일 2+2회담 분위기는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미일은 중일 간 영유권 분쟁지역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가 미일 안보조약 적용 대상임을 재확인하며 끈끈함을 과시한 반면, 우리는 대북 대화 재개와 관련해 미국과 온도차를 확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인권, 중국 견제 동참 등 우리 정부로선 난처한 청구서만 잔뜩 받은 모양새가 됐지요.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3각 동맹'을 중시해온 미국은 우리 정부에 '한일관계 개선'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인데 일본은 어떻게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 됐을까요. 일본인들이 쿨한 건지 자존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가해자에게 동화된다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인지. 35년간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한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만약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의 아시아 푸들'로 불리며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브로맨스'를 과시하다 골프장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와 같은 행동을 일본 지도자 앞에서 했다면, 아마도 한국 땅에서 생활하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최근 만난 일본 고위 외교당국자는 "일본 국민들도 미국의 원폭 투하에 분하고 안 좋은 감정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미국이 강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국익을 감안한 측면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애초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명분 없는 전쟁을 했다는 반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몽골을 제외한 이민족의 침입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일본은 지방 봉건영주 간 권력을 다투는 내전을 수없이 치르며 약육강식의 세계에 길들여졌습니다. 승자는 전국을 지배하고 패자는 항복하는 과정을 반복한 겁니다. 강자에게 무릎을 꿇는 DNA가 자연스럽게 몸에 밸 수밖에 없습니다. 핵폭탄이 진짜 무섭다는 걸 알았기에 미국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겁니다. 패전 후 7년 가까이 미 군정을 경험한 일본이 곧바로 미국과 밀착하고,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리가 처음으로 미일관계를 '동맹'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을 정도로 각별했던 미국을 선제 공격한 데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상호 승인할 정도로 미국과 공동전선을 유지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만주와 중국 본토를 침략하며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중국을 독차지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간파한 미국은 1941년 대일 석유수출을 전면 중단했고요.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조달해 온 일본은 그해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함대와 기지를 기습했습니다. 이날을 국치일로 여기며 칼을 갈았던 미국은 6개월 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전세를 뒤집었고 두 차례에 걸친 원폭 투하로 태평양전쟁을 끝냅니다. 일본 입장에선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과오가 있으니 대가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2016년 미일 정상이 각각 원폭 투하지인 히로시마와 태평양전쟁의 포문을 연 미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한 것은 미일동맹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킨 장면이었습니다. 그해 12월 아베 전 총리는 일본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진주만을 찾았습니다. 일본의 공습으로 침몰해 승무원 1,177명이 숨진 애리조나함 위의 추모관에서 희생자를 위령했습니다. 이에 앞서 버락 오바마는 그해 5월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히로시마를 방문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양국 언론들은 "미일 간 완벽한 군사동맹을 막는 마지막 걸림돌이 제거됐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한 이야기는 양국 간의 금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호 방문은 상대국에 대한 '진실한 사죄'보다는 미일 군사동맹을 한층 공고화하기 위한 이벤트에 가까웠습니다. 2011년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한 미국은 우군이 필요했고, 일본 역시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지 못하면 자국이 위태로워진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이에 70년 묵은 과거사를 털어내는 모양새로 끈끈한 동맹을 과시한 겁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철저히 국익만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움직인 일본의 행보입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공을 들인 아베는 덕분에 대내외적으로 일본의 자위력 강화를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2015년 안보법 개정으로 '전쟁 가능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아베였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1854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의 개항 압박에 근대화를 주장하며 메이지유신을 이끈 건 당시 하급 사무라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일지 모르는 이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강한 군대, 특히 해군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비유럽권에서 최초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견주는 나라가 됐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태평양전쟁에서 폭탄을 장착한 채 미군 함정으로 돌진한 일본의 가미카제 작전에 충격을 받은 미 전쟁공보처는 1944년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 연구를 의뢰합니다. 그간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일본 같은 적대국은 처음이었기에 그들의 특성을 연구해 앞날에 대비하자는 차원이었습니다. 1946년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출간된 배경입니다. 그가 일본을 단 한 차례 방문하지 않고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건 미일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의 대처는 어땠을까요. 구한말과 크게 다르지 않게 문을 더 굳게 잠가 배척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2019년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일본이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시행했을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항일 의지를 담은 민중가요인 '죽창가'를 거론했습니다. 여권 인사들도 '극일(克日)'을 외치면서 대일 외교노력을 주문하던 이들에게 '토착왜구'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였고요. 심지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출신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한일 갈등 해소 차원에서 발의한 법안도 거부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한일관계 개선'을 언급했지만, 정부가 관계 개선을 위한 큰 그림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한일문제는 필요하다면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한미일 3각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은 있지만 자력으로는 어렵다는 고백으로 들립니다. '의도적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의 태도로 취임 두 달이 다 돼가는 정 장관과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는 아직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장관과의 통화, 면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미국 외교·안보 투톱은 방한 기간 우리에게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며 한일관계 개선을 주문했습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가 있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미일은 물론 한일 안보협력도 강화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지난달 펴낸 '2020 국방백서'에서 일본을 '동반자'에서 '이웃국가'로 격하한 것을 감안하면 180도 달라진 태도입니다. 우리는 2018년 말 우리 해군 함정에 대한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의 저공 위협비행의 앙금이 가시지 않았지만 미국 입장에선 2015년 중재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우리 정부의 책임이 크게 보일지 모릅니다.
관건은 향후 대응입니다. 그간 한일 안보협력은 일본의 재침략 우려에 미국을 중간에 낀 상태에서 '비전투분야'에 국한됐습니다. 일각에선 한일관계를 발전시켜 오히려 일본과 더 적극적인 군사협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을 지낸 류제승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은 "전쟁을 많이 치러본 일본은 조직, 장비 등 군사협력을 잘할 수 있는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며 "100년 전 일본은 군국주의였고, 우리는 저항할 힘이 없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지만 이제 우리나라 위상은 미들파워급으로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없이 일본과 우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런 정보를 공유하면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며 "우리도 '역설적 이익'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미일 공통 이슈인 방위비분담금이나 미군 주둔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사전에 정보를 공유한다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만 한 걸음 떨어져 미일 간 밀착을 방치하면, 또다시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한국과 일본의 불행했던 관계는 임진왜란 7년과 식민지배 35년, 합쳐서 42년이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나머지 1,500년 교류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참 어리석은 일이다."
보수 논객의 발언이 아닙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입니다. 19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한 도쿄 납치사건을 언급하며 "내 자신이 일본에 큰 은혜를 입었다"는 말로 시작한 김 대통령의 연설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울렸고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김 대통령은 금기로 여겨졌던 일본문화 개방에도 합의했습니다. 당시에도 '왜색문화를 수입하면 모두 친일파가 된다'는 식의 반발이 컸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몇 년 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한류를 수출하게 됐습니다. 이 같은 역전 현상을 보면, 정부의 대일 군사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건 '죽창가'가 아니라 '자신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