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끝>떠난 이가 남긴 말
“제주에서 활동 중인 트랜스젠더입니다. 의료 조치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연락 드렸습니다.”
지난달 15일,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성확정 수술과 관련해서 인터뷰할 트랜스젠더를 수소문하던 차에, 이를 전해들은 이가 보내온 반가운 문자였다. 시민단체 관계자들로부터 “힘든 의료 조치 과정을 언론에 알리는 게 어려운 일이라, 나서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여서 더욱 그랬다. 실제 이후에 먼저 연락을 해온 사람은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 멀리 제주에 살고 있던 그를 아쉽게도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날 약 두 시간가량 통화를 했다. 그는 꿋꿋이 ‘자기 자신’으로 살며 세상을 설득하려 애썼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치권에서조차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나오는 등 우리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혔다.
그랬던 그가 인터뷰 9일 뒤인 같은 달 24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음악교사이자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정치인이었던 트랜스젠더 고(故) 김기홍(38)씨 이야기다.
우연히 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 하고, 그 내용을 내보내기도 전에 접한 부고는 황망했다. 그가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워 없애버린 용기와 희망의 말들을 되살리는 건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의료문제를 말했다. 2016년 정신과 진단을 받기 위해 전문의를 찾아가 수개월간 설득해야 했다. 호르몬 치료를 위해서는 성별불일치 진단이 필요한데 제주에선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며 진단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얼마나 되뇌었는지, 그는 트랜스젠더 진단명인 'F64.9 불특정 성정체성 장애 및 성역할 장애'라는 긴 단어를 한번도 더듬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그러나 진단 3일 뒤 지인으로부터 제주의 한 대형병원이 관련 진단을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료 조치가 암암리에 이뤄지는 탓에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다.
김씨의 에세이에는 이런 경험도 나와 있다. 그의 지인은 투신 자살을 하려다 구출돼 병원에 입원하려 했으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병원을 찾아 입원했지만 직원에게서 "트랜스젠더 더럽다"는 혐오 발언을 들었다. 이후 퇴원한 지인은 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이 때도 입원 과정에서 의사가 법적 성별을 문제삼았다. 김씨가 의사에게 경고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연락해서 대처해야 했다.
그는 인터뷰 당시 제주에서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서였지만 성소수자의 삶을 개선하고 싶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김씨는 이 직업을 택하게 된 계기로 2019년 친하게 지내던 성소수자 부부의 사망을 언급했다. 이들은 법적 혼인이 불가능했지만 서로를 혼인 관계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한 명이 사망했는데 법적 혼인이 아니니 상속이 불가능했다. 집과 재산이 모두 사망자의 명의로 돼 있던 탓에 남은 한 명은 마음 추스를 새도 없이 방을 빼야 했다. 안 그래도 경제난에 허덕이던 그는 배우자 사망 뒤 우울증을 호소하다 두 달 뒤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김씨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급하게 짐을 챙겨 나오던 친구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며 "법적으로 성소수자 부부의 권리가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 참담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변 성소수자 부부들을 대상으로 동거인을 수령자로 지정한 생명보험이라도 들도록 권유하고 있다"며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6년부터 초등ㆍ중학교의 계약직 음악교사로 근무했으나 2016년부터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더 이상 교사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동료 교사들조차 “남자가 남자다워야 학생들에게 본을 보일 것 아니냐”며 눈치를 주었고, 계약이 만료돼 다른 학교에 면접을 갔을 때도 성정체성 관련 질문을 받은 뒤 줄줄이 탈락했다.
김씨는 “교사 경력이나 음악 교육 능력, 이전 학교에서의 평가 등과 관계 없이 ‘머리가 왜 기냐’ ‘우리 학교는 두발 규정이 있는데 학생들이 항의하면 어떻게 하느냐’ 등 성정체성을 겨냥한 질문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김씨가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한 교사를 인권위에 제소해 해당 교사가 성평등 인권 교육 권고를 받기까지 했지만 김씨를 고용하는 학교는 없었다.
김씨는 교직에 복귀하기 위해 성정체성을 숨기는 대신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로 했다.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퀴어문화축제 공동조직위원장을 맡아 2017년 제주에서 처음으로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까지 3년간 이어졌다.
그는 제주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축제는 저에게 ‘생존활동’이 됐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나를 부정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운동은 존재부정에 저항하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 일터인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활동가의 삶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를 거치며 멈췄다. 약 10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여성혐오 발언을 올린 것이 논란이 됐다. 그는 "부족했고, 옳지 않은 걸 접하고 배워 왔다"며 사과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있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서 공부하겠다"고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녹색당 선거대책본부도 “후보자가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퀴어인권활동가로 성인지 감수성을 확산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반성에 함께한다”고 연대 의사를 밝혔다.
비난은 잦아들지 않았다. 김씨는 “SNS 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성소수자 전체에 대한 혐오로 비난이 번졌다”며 “내가 혐오의 빌미를 주는 바람에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1년간 사람을 못 만날 정도로 괴로웠다”고 말했다.
혐오와 그에 따른 피로는 쌓이고 쌓여 결국 그를 쓰러뜨렸다. 그는 지난달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글을 올렸다.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가 한 토론회에서 “퀴어 축제를 도심에서 안 볼 권리” 발언을 한 다음날이었다. 지난달 24일 그는 유서에 “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있어요. 미안해요”라고 적었다.
스스로를 ‘상큼한 김 선생’으로 지칭하며 웃음으로 저항하던 김씨는 이제 없다. 인터뷰 다음날 “의료 조치 관련 인터뷰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며 다른 취재원을 소개해주던 그를 생각하면, 당찬 외면 아래 이들이 얼마나 혐오에 신음하는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항상 성소수자들을 돕던 김씨의 모습을 기억한다”며 “마지막까지 희망의 목소리를 내던 개인마저 지치도록 방관한 현실이 참담하다”고 말했다. 이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개인들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이들을 도울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