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술, 낮술

입력
2021.03.1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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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살랑대니 어찌 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고로 최상의 술은 ‘춘주(春酒)’라 불렀습니다. ‘춘’자 돌림의 술 족보만 봐도 압니다.

고려 시대부터 전승된 전라도 여산(익산)의 호산춘(壺山春), 신선이 즐기는 곡차라는 별명이 붙은 경상도 문경의 또 다른 호산춘(湖山春), 서울 약현(중림동)의 약산춘(藥山春), 충청도 노성의 이산춘(尼山春), 평양의 벽향춘(碧香春) 등이 있지요.

전설적 춘주는 생애 한 번은 마셔보고 가야 한다는 중국의 동정춘(洞庭春)일 겁니다. 중국의 주선(酒仙)으로 불린 소동파가 ‘시를 낚는 갈고리요, 시름을 쓸어버리는 비’라고 헌사한 술입니다.

최고의 술에 봄을 붙이기 시작한 건 중국 당(唐)부터라고 합니다. 난만한 문화가 꽃핀 그 시대의 호사가 술 이름에서부터 풍깁니다. 향이 뛰어나고 담백한 맛이 빼어난 술만 봄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술과 봄은 말이 없어도 무언가 내통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봄은 술을 부릅니다. 누군가는 춘정을 천기(天氣)라 하더군요. 작작한 꽃향기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바 없는 춘정이 일어나 가슴은 벌렁대고 시는 입술에 맴도는데, 자연과 수작(酬酌) 하든 정인과 상열(相悅) 하든 어찌 몸과 마음을 사리겠습니까.

매화는 이제 지고 있습니다만 곧 비처럼 쏟아질 벚꽃 아래, 이름부터 춘정을 꼬드기는 도화 향기 아래, 이름부터 술을 부르는 행화 그늘 아래 자리를 깔아야 합니다.

저는 갈 겁니다. 사회적 감옥을 나와 술 좀 마시는 지음(知音) 몇 놈과 충청도 어느 바닷가 촌구석에 있는 손바닥만 한 친구의 농장으로 탈옥할 겁니다. 살구나무가 있어 우리는 행화촌이라 부르지요. 옛날 주막에는 다 살구나무를 심었습니다.

“청명에 보슬비 어지럽게 흩날리니/길 나선 나그네의 애간장이 타누나/주막이 어드메뇨 물으니/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두목, ‘청명’)

그런데 말입니다. 봄술은 낮술이어야 제격입니다. 몽롱하게 빨리 취할 수 있으니까요. 눈치 보일 수 있으니 평소 ‘낮술 환영’이라고 보일 듯 말 듯 써놓은 음식점 몇 개 정도는 알고 다녀야 합니다. 시인들이 왜 낮술에 대한 시를 썼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비 내리는 낮술을 안다//살아도 살아도 삶이 내게 오지 않을 때/벗이 있어도 낯설게만 느껴질 때/나와 내가 마주 앉아 쓸쓸한/눈물 한 잔 따르는//그 뜨거움” (김수열, ‘낮술’ 전문)

“…/낮술에 붉어진/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정현종, ‘낮술’)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박상천, ‘낮술 한잔을 권하다’)

압권은 이것입니다.

“이러면/안 되는데” (김상배, ‘낮술’ 전문)

벌건 봄날 대낮, 지금 술잔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술은 물로 빚은 불같습니다. 술과 시름은 동무입니다. 시름을 잊으려 술을 마시지만, 술만 있고 시름이 없다면요? 그건 그냥 음주일 뿐이지요. 술기운 오르면 춘면에 잠시 빠졌다 느짓 깨어나 다시 쓰겠습니다.



한기봉 전 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