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계 투신 정당성 논란은 일단 제쳐두자. 윤 전 총장이 지난해 10월 대검 국감 때만 해도 임기를 채우려는 생각은 확고했던 것 같다. “대통령이 임기를 지키면서 소임을 다하라는 취지를 전했다”는 내밀한 말까지 공개하며 “임기를 다하겠다”고 했다. 그런 그가 중도 사퇴를 결심한 것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축출 계획이 본격화하면서라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징계안을 결재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떠났다는 것이다.
만약 문 대통령이 추ㆍ윤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에 추 전 장관을 경질했다면 상황이 어땠을까. 윤 전 총장으로선 임기를 채우지 않을 명분이 없고 따라서 정계 진출도 쉽지 않았을 거다. 뒤늦게 신년기자회견에서 윤석열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감쌌지만 이미 떠난 마음을 돌려세우기는 어려웠다.
윤 전 총장을 잡을 또 한번의 기회는 있었다. 윤석열과 친분이 두터운 신현수 전 민정수석이 요청한 검찰 인사안을 수용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윤 전 총장으로서는 대통령의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 전 총장에게 사퇴의 명분을 던져준 중수청 설치 문제에서도 문 대통령의 판단 미스가 엿보인다. 국회에서 대통령의 의중을 놓고 청와대 비서실장과 여당 원내대표 간에 낯뜨거운 설전을 벌였던 그 장면이다. 문 대통령이 중수청에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면 윤 전 총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를 던지며 ‘대국민 호소’를 하는 진풍경은 없었을 것이다.
윤 전 총장이 막판에 보인 모습은 사실 그답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와 대구 방문, 대검청사 앞 사퇴 발표는 노회한 정치인을 방불케 했다. 퇴임의 변에서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거론한 건 출사표나 다름없었고, ‘국민 보호’라는 표현은 제왕적 인식의 발로였다. 그가 진정 뼛속까지 검찰주의자가 맞다면 ‘권력과 맞선 검찰총장’으로 끝까지 임기를 지켰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문 대통령으로서는 윤 전 총장을 붙잡는 게 나았다. “나갈 줄 몰랐다”는 청와대 언급은 전략적 실책을 시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말려봐야 소용없었다”고 할 게 아니라 애초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판단을 그르쳐 공연히 윤 전 총장을 반문(反文)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으로 만들어준 것 아닌가.
지금 정치권에서는 최재형 감사원장의 정계 진출설도 돌고 있다. 최 원장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 인사가 정치권 인사들을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최 원장이 진작부터 여당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아온 데다, 얼마 전엔 여권 인사로부터 “집 지키라고 했더니 주인 행세한다”는 모욕까지 당했으니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진 않다. 어차피 임기가 내년 1월까지인 마당에 조기에 그만두고 정치권 진출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윤석열과 최재형이 손을 잡는다면 여권으로선 악몽이나 진배없다. 회고적 투표가 아닌 미래적 선택이어야 할 대선조차 정권심판론에 좌우된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문 대통령의 그간 고위직 인사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정권의 철학과 가치를 공유해야 할 자리와 코드보다는 업무 수행 능력을 우선해야 할 자리를 구분하지 못했다. 사람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신뢰하는 바람에 실망하거나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윤석열, 최재형 사태도 따지고 보면 그래서 빚어졌다. 물러나는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도 구의역 김군 발언이 문제됐을 때 걸러냈어야 한다. 문 대통령의 나이브한 용인술이 임기 말 정권에 비수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