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집단의 서사, '미나리'를 응원합니다

입력
202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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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사문예지 뉴요커에 '9번가에서 본 세계'라는 제목의 오래된 표지가 있다. 잡지사가 있는 맨해튼 9번가에서 본 풍경에는 10번가와 허드슨강까지 맨해튼 서쪽 끝이 촘촘하게 나와 있고 강 건너 듬성듬성 그려진 뉴저지와 몇 개 주 너머에 태평양이 자리잡고 있다. 태평양을 건너면 중국과 러시아가 보이고 그 사이에 일본이 살짝 끼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라는 게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어서 주변의 익숙한 것들은 상세하게 구분하고 멀리 있는 것들은 뭉뚱그려 보게 된다. 사회학자들이 '외부집단 동질성 편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경향성이 사람들을 대할 때 적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와 가깝고 익숙한 사람들은 고유한 개성을 가진 개인들로 보이지만 나와 거리가 먼 외부집단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 편향을 경험하게 된다. 내 연구실 옆 방에 중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학과 직원과 동료 교수들이 그 친구와 나를 혼동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친구가 나보다 키도 크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는데도 그랬다. 각각의 개성과 상관없이 그 친구와 나는 비슷해 보이는 아시아 남자라는 외부집단인 것이다. 반면 같은 학과에 몇 명이나 되는 로버트라는 이름을 가진 백인 남자 교수들을 혼동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1980년대 디트로이트에서 빈센트 친이라는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 자동차 업계의 불황이 일본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크라이슬러 노동자들에게 맞아 죽었을 때도, 최근 미국 곳곳에서 중국 때문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졌다며 아시아인들이 폭행 대상이 될 때도, 그 대상의 개인적 인격은 물론이고 출신 국가도 중요하지 않다. 인도인부터 일본인까지 다 포함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인종 범주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몇 주 전 스트리밍으로 첫 공개된 '미나리'를 세 식구가 같이 보았다. 세상 어두운 구석을 주로 들여다보는 사회학을 하다 보면 냉소적이 되기 쉬워서, 소수인종 영화인들이 영화상 시상식에서 소수인종 아이들이 자기 영화에서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는 수상소감을 늘어놓을 때 삐딱한 눈초리로 보곤 한다. 이런 문화적 상징이 얼마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그렇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눈을 떠가는 중학생 아이가 '미나리'를 보며 우리 가족 이민사와 비교하고 한국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을 보면서, 딸아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이삭 감독의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를 놀란 눈으로 보는 아이에게 화면을 오래 봐 그렇다고 둘러대면서, 소수집단의 문화적으로 재현될 권리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렸다.

인종과 계층으로 분리된 미국의 일상에서 외부집단에 대한 편향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소수자를 다루는 '미나리' 같은 영화나 문학작품이 중요하다. 낯선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독특한 개인사와 생각과 감정을 가진 개별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또 그들의 삶을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 공감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미국 주류사회가 한국계 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은 복잡하고 깊이 있게 만들고 우리 아이에게 한국계 미국인의 또 다른 서사를 제공해 준 '미나리' 팀에 응원을 보낸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