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이달 8일(현지시간),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장관)
"현재 인플레이션 우려할 만한 상황 아니다."(지난달 25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미국과 우리나라의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주관하는 담당자들이 연일 소리 높여 인플레이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이를 믿지 않는 눈치다. 연초만 해도 1% 선을 밑돌던 미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꾸준히 늘어 8일(현지시간) 장중 1.6%를 뚫었고, 우리나라 10년물 국채 금리도 2019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2%대로 올라섰다. 장기 국채 금리가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만큼, 시장의 심리는 이미 잔뜩 달궈져 있는 셈이다.
국채 금리뿐만 아니다. 지난해 부풀어 올랐던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뿐 아니라 올해는 소비자물가와 유가, 원자재 가격까지 오르고 있다. 주말마다 북적이는 백화점은 소비심리 회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정말 정책 당국의 말대로 인플레이션은 아직 먼일일까.
인플레이션을 예측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지난해부터 전례 없는 수준으로 풀리고 있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유동성이다. 기준금리를 0.5%로 내려 10개월째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0~0.25%)과 유럽(0%), 일본(-0.1%) 등 전 세계 주요국이 대부분 '제로(0)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재정부양책도 쏟아진다. 미국은 상원은 최근 1조9,000억달러(약 2,100조원)에 이르는 경기부양안을 통과시켰으며, 우리나라도 20조원에 달하는 4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논의 중이다. 사실상 인플레이션의 기본 요건이 갖춰진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체감물가 상승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 연간 상승률은 1.1%를 기록해 지난해 2월 이후 가장 높았다. 특히 농축수산물 물가지수는 1년 전에 비해 16.2%나 올라 '밥상 물가'를 크게 끌어올렸다. 파(227.5%)와 달걀(41.7%), 고춧가루(35%) 등 주요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체감물가는 더 크게 상승했다.
그나마 물가 수준을 낮춰주던 에너지와 공공요금도 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 피습 이슈와 함께 산유국 연합체(OPEC+)가 감산 정책을 유지하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가 시행되면서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이 커졌고, 일부 지자체에서는 수도요금이나 교통요금 인상을 검토 중이다.
그럼에도 정책당국이 인플레이션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직 본격적인 소비 회복세가 숫자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나타나는 '보복소비'가 폭발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한 물가 상승이 일시적인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달 "본격적인 수요 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물가 상승 압력은 있지만 지속 여부는 미지수"라고 언급했다.
고용 상황이 절망적인 것도 문제다. 올해 1월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5.7%를 기록하면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취업자 감소폭은 외환위기 이후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진정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고용이 개선되고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올라 소비 증가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 단계가 끊겨 있는 만큼 인플레이션을 진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당국이 인플레이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디플레이션이다. 2000년대 들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러 차례 터져 나왔지만, 실제로는 저물가 저성장 상태가 고착화한 상태로 20여 년이 지나왔다. 지난해엔 코로나19로 마이너스 성장까지 기록한 만큼, 올해는 기저효과를 감안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착한 인플레이션'은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당국이 보는 것처럼 현재의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시장에 풀린 풍부한 유동성에 소비자물가가 상승하고, 재정부양책으로 경기 회복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철 KB국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의 인플레이션 우려가 아예 근거 없는 건 아니다"라며 "백신 접종으로 서비스 물가까지 살아난다면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 금리가 지속적으로 오를 경우 역사적으로 미국 연준 등 각국 중앙은행들이 결국 유동성 회수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마크 잔디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장이 금리 인상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며 "인플레이션은 바로 코앞에 와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