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기도 서남부의 시흥시와 광명시 사이를 걷는다. 두 도시의 접경 지역 가운데로는 목감천이라는 하천과 오류선=경기화학선=3군지사선이라는 철도 노선이 놓여 있다. 그리고 목감천과 철길의 서쪽으로는 시흥시의 금오로, 동쪽으로는 광명시의 광명로 도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일대는 동서의 길쭉한 산악지역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계곡 형태를 이루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을 둘러싸고 최근 발각된 일부 LH 직원들의 투기 사건은 이 계곡의 중간 지점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시흥과 광명의 경계를 이루는 이 남북으로 길쭉한 계곡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감천을 따라 걸으면 된다. 시흥시의 동남쪽 끝 목감동에서 발원해 북상하는 목감천은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서울지하철 1호선 구일역 아래에서 안양천과 만난다. 현재 많은 수도권 주민들에게 목감이라는 지명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목감IC로 친숙하지만, 막상 목감이라는 동네에 발을 디디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역사적으로 오래되어 보이는 블록을 걷다보면 20세기 중기의 개량 기와집을 몇 채 만날 수 있어서, 안산과 시흥 사이의 교통의 요지로서 일찍부터 번성한 목감 지역의 역사가 확인된다. 그 가운데 한 채의 기와집 문에는 '조남리'라고 적힌 한전의 마크가 붙어 있다. 행정동인 목감동이 관할하는 법정동 조남동이 1989년 이름을 바꾸기 전의 옛 이름이 조남리이다.
목감동에서 목감천을 따라 걷다보면 시흥시 무지내동에서 철길과 만나게 된다. 이 지역의 군부대에서 시작되는 철길은 한동안 목감천과 나란히 달리다가, 광명시 옥길동에서 철길은 서쪽으로 목감천은 동쪽으로 갈라진다. 강과 철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는 시흥과 광명의 두 지역은, 소규모 공장과 자원재생업체와 논밭이 혼재된 수도권의 개발제한구역이자 오류광산과 광명광산이라는 광산이 있던 광업지대라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강과 철길을 따라 걸으며 서쪽의 시흥과 동쪽의 광명을 찬찬히 살피면 실제로는 두 지역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흥 쪽에서는 중림마을·모갈마을 같은 전통적인 마을들이 공장과 자원재생업체들에 포위되어 마을로서의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반면 광명쪽에서는 원가학·원노온사·원광명 등 광명시의 원형을 보여주는 이름의 마을들이 전통 마을로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시흥 쪽처럼 이들 광명 쪽의 마을에도 공업시설이 들어서 있고, 원가학마을의 자원회수시설, 원노온사마을의 상하수도 시설, 원광명마을의 전력소 등 광명 쪽의 마을들 역시 각각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광명 쪽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농업이 견실히 이루어지고 있고, 마을 입구마다 그 마을의 유래를 전하는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는 등 애향심이 느껴진다.
목감천을 경계로 나란히 놓인 두 지역의 분위기에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특히 시흥시가 형성된 과정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현재의 시흥시는 조선시대의 시흥군과는 영역이 (거의) 겹치지 않고, 식민지 시대 초기인 1914년 비로소 시흥군에 포함되었다가 1988년 시흥군이 해체될 때 시흥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는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ㅏ
지금의 시흥시를 이루는 여러 지역 가운데 가장 정체성이 확실한 지역은 북부의 옛 소래읍 일대로 보인다. 현재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했던 조선시대 시흥군과 지리적으로 거의 무관한 시흥시는, 1989년 시흥군이 해체될 때 그 이름을 소래시로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도 일각에 존재한다. 현재의 시흥시는 부천 소사와 하나의 생활권이었던 북부의 옛 소래읍 지역, 1721년 시작된 호조벌로부터 시작된 간척지와 염전으로 이루어진 중부 지역, 반월국가산업단지와 배후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남부 지역, 그리고 산을 사이에 두고 이들 모든 지역과 단절되며 오히려 목감천을 사이에 두고 광명시 서부와 평지로 이어지는 길쭉한 동부 지역 등, 시흥시의 각 지역은 긴밀한 지리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각각 별개로 움직이는 인상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수도권의 남양주시나 용인시도 하나의 큰 중심이 없이 각 지역이 각각 따로 발전하고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분산적인 발전 양상이 이번에 발각된 투기 사례처럼 기획부동산 세력들에게 파고들 여지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시흥시 여타 지역과는 산악지역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흥시 동부 지역에서는, 금오로라는 남북 2차선 도로를 따라 부라위마을, 중림마을, 모갈마을 등의 옛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이들 옛마을은 공장과 자원재생시설 등에 파묻혀 주거지로서의 모습을 크게 잃었다. 한국의 어느 지역을 가도 마을회관·노인정은 마을의 중심에 놓여 있는데, 현재 시흥시 동부 지역에서는 마을회관·노인정 바로 옆에서 공장들이 수없이 세워져 있고, 주변에는 빈 땅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이들 난개발된 토지 가운데 일부가 이번에 일부 LH 직원들의 투기 대상지가 되었다.
나는 이들 마을을 걸으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말로는 개발제한구역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난개발되는 것을 방치할 바에는, 차라리 질서 있게 개발하고 환경을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공장지대로 변하여 옛 마을 모습을 거의 잃은 곳 가운데 하나가 시흥시 과림동의 모갈마을이다. 모갈마을 초입에서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고, 이 신작로 옆으로 좁게 나 있는 옛길에는 폐업한 것으로 보이는 식당 건물과 아무도 찾지 않아 지저분해진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앞에는 시흥 과림지구 주민대책위원회 명의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모갈마을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과림동 주민센터 앞에도 '시흥광명 신도시 대책 주민설명회' 플래카드와 '강제수용으로 원주민 쫓아내는 국토부 장관 퇴진하라'는 플래카드가 위아래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서울의 비싼 고층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투자처를 물색하는 사람들이 일으키고 있는, 3기 신도시를 둘러싼 갈등 도시의 현장이다.
과림동 주민센터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북쪽에는 중림·비석거리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곳에는 과림동 출신의 신안 주씨 일족인 주석범, 주순원, 주인식, 주영식 3대가 대대로 마을에 선행을 베풀었음을 기리는 '신안 주씨 석범·순원·인식 삼세 적선비'와 '주공영식 자선 기념비'가 서 있다. 1917년 세워진 '삼세 적선비'는 1922년에 세워진 비각(碑閣) 안에 들어 있고, 1924년에 세워진 '자선 기념비'는 비각 없이 야외에 노출되어 있다. 20세기 전기의 비석 두 개가 공장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시흥시 동부 지역의 지난 100년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은 복잡한 느낌을 준다. 일부 LH 직원들의 투기 사건으로 인해 3기 신도시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고, 신도시 한켠에 이들 비각이 자리하게 되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비석거리를 지나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면 한때 낚시로 유명했던 과림저수지 옆으로, 이번 투기 사건에서 몇몇 LH 직원들이 거액의 대출을 일으킨 북시흥농협 과림지점과 창고, 농경지와 폐기물업체 등이 나타난다. 북시흥농협 과림지점은 농협 창고 건물이 단정해서 2018년의 답사 당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곳이 이렇게 뉴스의 중심으로 떠오를지는 몰랐다. 아, 물론 일부 LH 직원들은 알았겠지만 말이다. 이 근처에도 이들 일부 직원이 공동으로 구입해서는 빽빽히 나무를 심은 땅이 있다.
목감천과 철길은 이 부근에서 갈라진다. 목감천은 광명스피돔과 광명새마을시장부터 도심지로 접어들어, 서울 구로구와 광명의 경계를 이루며 안양천에 흘러든다. 경기도 일대에서 가장 성업 중인 전통시장 가운데 하나인 광명새마을시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추진된 새마을운동 마크를 시장 입구에 내건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까지 함께 걸은 답사 동료들과 시장 식당 두세 곳을 들렀는데, 가는 곳마다 시흥 과림동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옆자리에서 정부와 LH를 성토하고 있었다. 주거지를 광명에 둔 농민들이 시흥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철길은 옛 경기화학 공장부지에 세워진 부천시 옥길동의 남부수자원생태공원과 고층 아파트단지, 그리고 서울 구로구 항동에 조성된 공공주택지구를 지나 오류동역으로 들어간다. 내가 처음 이 지역을 답사한 2018년에는 항동 공공주택지구가 한창 조성중이었는데, 고층아파트 단지가 올라가던 항동과 시계(市界)를 맞닿은 부천 옥길동에서는 개발제한지구의 전형적인 경관이 펼쳐져 있어서 이와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한편으로 '항동 철길'이라 불리며 서울시 서남부의 산책 코스로 떠오른 철길은 이 부근부터 오류동역에 진입할 때까지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항동 철길을 따라 걷다보면 반세기를 뛰어넘어 20세기 중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철길은 오류동역 근처에서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오늘 답사는 여기까지다.
현지인이나 도시계획·부동산에 관심 있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알지 못하던 시흥과 광명의 접경지역이 한국 사회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왔다. 이번 투기 의혹 사건이 촉발시킬 변화는 아마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적잖이 바꿀 것이다. 대서울의 외곽은 갈등도시의 현장이고, 미래를 향한 변화는 언제나 외곽 지역으로부터 시작된다. 시흥과 광명 사이를 걸으며 그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