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의 대표 질환이자 영원한 숙제인 조현병의 핵심 증상은 망상이다. 망상을 사전적 의미로 가볍게만 받아들인다면, 우리 주변에는 망상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실제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그건 망상이지”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조현병을 앓는 환자들이 경험하는 망상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도청기를 이식했다는 망상은 오히려 그럴 듯해 보이는(?) 케이스다. 미래에 자신의 아이가 세상을 멸망시킬 악당이 될 테니 태어날 수 없게 미리 자신의 성기를 잘라 버리는 식의 황당하고 극단적인 망상도 있다. 일반인들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실제 정신의학과 임상 현장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극단적 망상을 가졌던 환자와 그 환자를 치료했던 의사 이야기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수련 과정을 보면 대개 1년차 전공의들이 조현병 환자들의 주치의가 된다. 처음에는 가장 증상이 심하고 치료도 힘든 환자들을 왜 갓 들어온 신입 전공의가 담당하는지 의아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선 크게 3가지 관점, 즉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시각을 통해 질환에 접근한다. 이를 생물심리사회 모델(biopsycosocial model)이라고 한다. 당시의 가벼운 생각으로는 "1년차 전공의는 면담에서 실수가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심리적, 사회적 접근이 필요한 질환을 맡기기보다는) 조현병처럼 생물학적 요인이 큰 병을 담당하게 해서 약물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하게끔 하는 것이구나"라고 짐작했고,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 그런 의문은 그냥 잊혀 갔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어느덧 보호병동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전공의 2년차가 된 나는 1년 전보다 한층 더 의기양양해졌다. 후배 1년차가 첫 담당 환자를 배정 받았을 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 한다며 자신있게 설명해줬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는 게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중 한 환자는 내가 1년차 때 진료를 맡았던 만성조현병 환자였다. 그는 자신이 걸어 다니면 세상이 망한다는 망상 때문에,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는 환자였다. 화장실을 가거나 이동해야 할 때는 기어 다녔다. 내가 부축하려고 잡으면 화들짝 놀라면서 털썩 주저앉아 심하게 화를 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매일 아침 침대 곁에서 짧게 안부 인사를 나누고, 불편함이 없었는지 물어보고, 그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고,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후배 전공의에게도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만성 조현병 환자의 망상은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과 무력감 같은 것이 있었다. 또한 생물학적 요인이 크기 때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적절한 약을 처방해주고, 불편한 부분 없이 지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전부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내가 1년 동안 배운 건 그것뿐이었고 그게 전부인 양 후배에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차 전공의 후배는 그렇지 않았다. 몇 개월 후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후배는 매일매일 조금씩 그 환자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갔다. 처음에는 환자복을 갈아 입혀 줬고, 그 다음에는 손발을 씻겨 줬다. 시간이 지나서는 세수를 시켜 주고 머리를 감긴 후 빗어 줬다. 누워만 있으려고 했던 환자는 서서히 앉기 시작했고, 그러자 후배는 그와 함께 밥을 먹었다.
의사와 함께하는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그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걷기 시작했다. 1년차 전공의는 환자에게 좋은 약을 처방하고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불편함이 없는지 살펴보는 기본적인 부분을 넘어,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마음을 함께 나누었다. 그냥 단순한 면담이 아닌 그 환자가 필요로 하는 ‘언어’를 통해서.
환자를 위하는 마음, 환자가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그 진실한 마음이 전해져 십여 년 동안 환자 자신의 삶과 함께 신념이 되어 버린 망상마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자기를 치료해주는 의사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런 믿음을 주는 의사와의 관계가, 환자 자신의 삶의 신념보다 더 큰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성경에서나 읽을 수 있던 그런 기적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치료를 술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대화라는 것이 음성과 의미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그 환자와 후배를 통해 진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1년차 때 배워야 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의 ‘태도’를 그때서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뒤늦게 배운 이 진심이 담긴 태도는 그날의 충격과 함께 지금도 내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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