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 '70년' 공든 탑 '6시간' 불법계엄에 무너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계엄 사태'는 70년간 공들인 대한민국 외교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발언대로 불과 6시간 이어진 비상계엄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시계는 순식간에 70년 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제 외교 무대에서 대한민국은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평시 비상계엄 선포도 가능한 정치적 불안정국'으로 전락했다. 신뢰 붕괴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미국, 일본, 스웨덴,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 정상 및 고위급의 방문이 줄줄이 취소됐고, 한국은 한시적으로 여행주의 국가로 지정됐다. 당장 차세대 신기술 및 반도체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됐던 한미 경제협력 사업은 갑작스럽게 터진 계엄과 탄핵 사태로 축소되거나 취소됐다. 특히 반도체업계에서는 "차세대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곡소리가 나온다. 한국 반도체 성장 및 기술 지원을 위한 이른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정국 혼란으로 또다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원자력 및 방산 수출 산업에도 제동이 걸렸다. 정부는 체코 이후 폴란드와 불가리아, 터키, 영국 등에 소형모듈원전(SMR)을 포함한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려 했지만, 비상계엄으로 협의가 사실상 중단됐다. 방산업계도 마찬가지다. 당초 연내 타결로 예상됐던 K2 흑표전차의 폴란드 추가 수출 계약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방한 중이었던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지난 4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방문해 한국형 기동헬기 생산 현장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정국 혼란으로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5~7일 방한해 국내 방산 기업 경영진들과 만날 계획을 조율하던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도 모든 계획을 취소했다. 이 밖에도 한국은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로 자동차 시장은 독일과 일본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중국에, 조선사업 또한 중국에 역전당할 위기에 처했다는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종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윤 대통령 손으로 한국이 경제적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코리아 피크' 모먼트를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대한민국의 수출은 대체불가능한 부품·소재를 수입해 대체가능한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구조"라며 "정치·경제적 불확실성 확대로 다른 경쟁 국가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쉬워졌다"고 지적했다. 비상계엄은 대한민국 외교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외교부는 지난 12일 '2025 예산'이 2024년(4조1,905억 원)보다 2% 늘어난 4조2,788억 원으로 국회에서 10일 확정됐다고 알렸다. 특히 내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과 관련한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은 전년 대비 394억 원이 감액돼 약 13억5,500만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되면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식 정책을 펴려고 할 때 한국이 이에 맞춰 동원할 수 있는 ODA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진다. 정부는 당초 ODA 예산 편성을 위해 국회와 충분히 협의할 계획이었지만 비상계엄으로 축소된 예산은 조율 없이 그대로 통과됐다. 한 외교 소식통은 "국제 정세 변환점이 될 수 있는 순간에 외교력을 펼칠 예산 인프라가 부족해진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13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들은 '탄핵정국에 대한 2차 비상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교수들은 "우리나라는 당분간 주요 7개국(G7) 가입이나 글로벌 리더십을 논의하지 못할 정도로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며 "한국은 그동안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표본이었지만, 비상계엄 하나로 민주주의 퇴행을 상징하는 국가로 한순간 전락했다"고 성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