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조직적 정치인 사찰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 가운데, 당시 인천 남동구청장이던 배진교 정의당 의원에 대한 국정원 사찰 문건 원본을 17일 한국일보가 입수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해당 문건을 열람 후 복원하는 방식으로 간접 공개한 적은 있지만, 원본이 세상에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배 의원 동의를 받아 문건을 공개한다.
국정원이 생산한 14쪽 분량의 문건엔 이명박 정부가 야당을 어떻게 규정하고 다루려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에 대해 "종북" "이념 오염" "주민 현혹" "국가 정체성 훼손" 등의 표현을 쓴 것은 사찰의 잣대가 '색깔론'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찰이라고 하지만, 동향 파악 수준 아니었겠냐'는 정치권 일각의 추측을 무색하게 한다. 무엇보다 국정원은 야당 소속 지자체장들의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세세하게 파악해 문건에 표를 만들어 일일이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이들을 압박하기 위한 정부 부처별 ‘액션 플랜’까지 짜서 내려보냈다.
당시 현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사찰 문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지자체장들보다 청와대 '심기'를 거스를 일이 훨씬 잦았을 의원들에게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얼마나 심각한 사찰을 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사찰 문건 제목은 '야권 지자체장의 국정운영 저해 실태 및 고려사항'이다. 이명박 정부 4년차인 2011년 9월 15일 작성됐다. 사찰 대상은 광역 지자체장 8명과 기초 지자체장 24명으로, 당시 야당인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과 민주노동당(정의당 전신) 소속이었다. 문건은 야권 지자체장 32명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분석한 '총론'과 개인별 문제를 나열한 ‘붙임’ 부분으로 구성된다.
'총론'에서 국정원은 이들이 “국익과 지역 발전보다는 당리당략ㆍ이념을 우선시하며 국정기조에 역행하고 있다”며 “적극 제어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지자체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보수 단체 지원을 축소하고 △‘종북ㆍ좌파’ 인물을 주요 보직에 중용하고 △‘좌파 강사’를 동원한 강연회를 열었기 때문에 나쁘다고 했다.
배진교 당시 남동구청장에 대해서는 “‘부모스쿨’(150명)을 운영하며 강사진에 전교조ㆍ민노총 출신을 배치했다”라고 지적했다.
국정원은 또 야당 지자체장들이 이명박 정부의 대표 정책인 4대강 사업 등을 흔든다며 이들이 “대(對) 정부 비난 여론 및 국론 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지자체가 도입한 무상급식을 ‘세금 급식’으로 지칭,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지자체장들이 김대중 정부의 2000년 6ㆍ15 공동선언의 이행을 촉구한 것을 두고는 “지역민들의 정부 대북정책 불신을 유발한다”고 평했다.
국정원은 정부 부처를 동원해 야당 지자체를 압박하려 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원은 “당정이 가용 수단을 총동원, 야권 지자체장들의 국익ㆍ정책 엇박자 행보를 적극 견제ㆍ차단함으로써 국정 결실기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뒷받침해야 한다”며 각 정부 부처에게 야당 지자체장을 압박할 구체적이고도 노골적인 ‘액션 플랜’(실행 계획)을 할당했다.
행정안전부에는 지자체에 주는 교부세 감액과 지방채 발행 중단 등 불이익을 주라면서도 “국정에 협조하는 지자체에는 특별교부세ㆍ총액인건비 등 인센티브를 줘서 여타 지자체의 태도 변화를 적극 유인하라”고 했다. 야당 지자체장이 밉다고 주민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한 것이다.
감사원에 “종북 단체의 사회단체 보조금 부당사용 여부를 면밀히 점검하라”고 지시한 것은 국가 최고 감사 기관인 감사원마저 동원할 정도로 무자비한 정치인 탄압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국정원은 “건전 언론 및 보수 단체와 협조, 규탄 성명 발표, 항의집회 개최 등으로 지역 내 비판 여론 조성을 통해 지자체장의 독단적 행보를 저지하라”며 언론을 동원한 여론전도 주문했다. 기획재정부에는 “예산 삭감 등 실질적인 제어 장치”를 가동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압박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해당 문건에 사찰 대상으로 적시된 염태영 경기 수원시장(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국정원 등을 상대로 민ㆍ형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야권 지자체장의 국정 운영 저해 주요 사례’라는 제목의 문건 '붙임' 부분에서 국정원은 야당 지자체장 한명 한명의 문제점을 꼼꼼히 나열했다.
국정원은 배진교 의원이 노조 활동가 출신을 구청 자문위원으로 임명한 것을 두고 “종북 인물을 기용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배 의원이 전교조 출신을 강사로 기용해 강좌를 연 사실까지 적시하며 이를 “지역사회 이념 오염 조장” “종북ㆍ좌파 논리 전파 및 정부정책 비판 여론 조성”으로 매도했다. 국정원이 일개 구(區)의 주민 상대 강연 행사까지 챙긴 것이다.
배 의원은 “국가 권력이 지자체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살피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소름 돋고 무서운 일”이라며 “정신적인 고문이나 다름없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또 “구청장 재직 당시 감사원 감사를 받은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사찰의 결과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