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을까. 빨리 이 봄에 시집을 내야 해요. 그리고 한 권 보내주세요. 원색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중략) 되도록 비싸서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는 뉴욕에 체류 중이던 1966년 시인 김광섭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홍대 교수직을 버리고 새로운 미술을 접하기 위해 1963년 미국 뉴욕으로 떠난 그는 김광섭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고국의 소식을 접했다.
이어 그가 말한다. “요새 제 그림은 청록홍 점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수평으로 한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이 점들이 내 눈과 마음엔 보옥(寶玉)으로 보여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점으로 채워진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글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의 필력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김환기가 김광섭에게 보낸 자필 편지를 비롯해 화가와 시인ㆍ소설가가 교류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 중이다. 그림 그리는 시인과 소설가, 글 쓰는 화가 그리고 이들 간 상호작용을 집중 조명한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다.
화가지만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던 이는 김환기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여자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천경자는 전문적인 화가이지만, 대중적 사랑을 누린 수필가이기도 했다. 전시회에서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뿐 아니라 여인소묘, 유성이 가는 곳, 언덕 위의 양옥집 등 그가 쓴 수필집 원본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소설가지만 그림을 잘 그렸던 문인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외조부로 잘 알려진 소설가 박태원은 소설을 쓰면서 직접 삽화를 그렸다. 카메라 앵글이 비추는 듯한 느낌의 삽화는 묘하게 영화감독 봉준호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 미술 부문 기획을 맡은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남녀의 애정행각을 카메라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표현한 삽화 등 흥미로운 삽화를 많이 그렸다”고 설명했다.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시인 이상 역시 소설 속 삽화를 그렸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는 친구였던 이상이 그려준 것이다.
개인 소장자의 침실에 걸려 있던 김환기의 ‘달밤’도 전시장으로 왔다. 이 작품은 시인인 김광균이 부산 사무실에 걸어뒀던 작품이다. 시인이면서 사업가이기도 했던 김광균은 여러 문예인을 후원했다. 김광균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을 보면, 사진 속 김광균 뒤로 김환기의 ‘달밤’이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암흑의 시대로 인식돼 왔던 일제 강점기는 놀랍게도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자라난 때”라며 “한국인이라면 알만한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화가는 1930~40년대 활동을 시작하며 서로 영감을 주고 받았다”고 전했다. 암울한 시기, 찬란한 예술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자리라는 설명이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다. 설날 당일인 12일에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