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신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이 이끄는 중국 견제 목적의 다자안보협력체인 '쿼드(Quad)' 참여에 선을 긋고 나섰다. 정 장관은 취임 첫날인 9일 외교부 청사 출입기자들과의 약식 회견에서 쿼드 참여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투명하고 개방적이며 포용적이고, 국제규범을 준수한다면 쿼드를 포함한 어떤 지역협력체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제 조건으로 투명성, 포용성, 개방성 등을 내건 것 자체가 중국을 배제한 쿼드의 배타성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쿼드는 미국을 선두로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한 중국 견제 목적의 안보협력체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출범했다. 후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8일(현지시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의 통화에서 취임 이후 '쿼드'를 처음으로 언급, 중국 포위망 구축의 방편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상태다. 그러나 쿼드가 노골적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는 한 직접 참여는 어렵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한미동맹과 관련해선 "여러 어젠다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미 간에는 입장에 큰 차이가 없다"고 정 장관은 설명했다. 그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 조기 달성은 한미 간 공동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이뤄나가냐에 대한 의견 조율도 용이하게 할 수 있다"면서 "동맹관계가 굳건하기 때문에 다소 상이한 의견이 있더라도 조율하는 데 크게 문제 될 게 없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재직 당시의 북미 정상 간 외교를 물밑에서 조율했던 경험을 살려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다만 '물밑 조율사'에서 '외교 전선의 전면'으로 무대를 바꿔 탄 정 장관의 실제 역할은 대북 외교보다 '동맹 관리'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노선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과의 연대 구축을 향하고 있다. 미국 신 행정부의 동맹주의에 우리 정부가 얼마만큼 호응해줄 것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우리 정부의 바이든 행정부를 향한 북핵 협상 재개 요구에도 힘이 실릴 것이란 지적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우리 정부와 바이든 행정부 간 평가부터가 엇갈리고 있다"면서 "정 장관이 잘못된 분석에 기반한 외교를 펴고 있다고 국무부가 판단할 경우 동맹관리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한일관계 회복 역시 정 장관의 코앞 과제다. 한미일 3각 협력 체제를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 기조에 호응하자면 악화일로의 한일관계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외교부도 이같은 우려에 공감하고 있지만 정작 위안부·강제동원 문제 등에 대한 획기적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편 정 장관의 이날 출근은 2003년 주(駐)제네바 대사에서 물러난 뒤 18년 만에 첫 외교부 출근이란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외교부 내에선 묘한 긴장감도 흘렀다. 전임 강경화 장관 시절 직원들의 근무 강도가 다소 유연해졌으나 '올드 보이'의 귀환으로 업무 강도가 다시 올라가지 않겠냐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 장관은 외무고시 3기인 반기문 전 유엔총장보다 불과 2기수 아래로 외교가에선 대선배 격이다. 실제 이날 취임사에서 정 장관은 "외교관은 총 없는 전사"라고 했던 고(故) 박동진 외무장관의 말을 소개하며 직원들에게 책임감과 새로운 각오를 당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