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분노하고 가슴 아파한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촘촘히 살펴달라."
지난 18일 정영애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이 취임 인사차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찾은 자리. 주 원내대표가 정 장관에게 "여가부가 존립 근거를 의심받는 일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면서 건넨 말이었다. 16개월된 입양아가 학대 끝에 숨진 '정인이 사건'이 온 국민의 공분을 얻고 있을 때였으니 야당 원내대표로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 장관은 뭐라고 답해야 했을까. 신임 인사차 간 자리였으니 열심히 잘해보자는 차원의 서로 웃으면 덕담 정도 주고 받고 끝났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실 정답은 "입양 아동이나 아동 학대 문제는 여가부 소관사항이 아닙니다"이다. 입양과 아동학대 문제는 아동복지정책과를 두고 있는 보건복지부 관할이다. 여가부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통해 아동학대 문제 일부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해프닝은 여가부에 대한 기대와 비판이 어디서 엇갈리는지 여실히 드러낸 장면으로 꼽힌다. 부처 이름에 '여성'에다 '가족'까지 들어가 있으니 왠만한 사람들은 여성과 가족에 관련된 모든 사안에 여가부가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다른 부처와 중복된 영역이 많다보니 이 모든 게 여가부 일 같지만, 사실은 여가부 담당이 아닌 일이 부지기수다.
이는 여가부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2001년 처음 만들어질 땐 여성부였다가, 참여정부에서는 여성가족부로 확대됐다. 부처에 '가족' 이름을 붙이게 됐으니 보육과 가족 업무를 가져왔고 보건복지부 소관인 건강가정기본법이 여가부로 넘어왔다. 하지만 '작은 정부'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가족 업무를 복지부로 되돌려주면서 여가부는 다시 여성부가 됐다가, 2010년에는 청소년·가족 기능 일부를 받아 다시 여가부가 됐다.
전윤정 국회입법조차서 입법조사관은 "사실 가족 정책의 핵심은 '보육'인데 이명박 정부 당시 이 업무가 복지부로 이관되면서 부처 이름엔 '가족'이 있는 여가부가 실제론 가족 업무 가운데 틈새적 업무만 맡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예산에서도 나타난다. 복지부 아동·보육 예산은 무려 8조5,568억원에 이르는데 여가부의 가족예산은 고작 7,375억원이다. 내용을 봐도 저소득 한부모가족 자녀양육지원(3,126억원), 아이돌봄서비스 지원(2,515억원) 같은 부수적인 틈새 지원 사업이 대부분이다. 청소년 예산 2,422억원도 학교밖 청소년과 위기청소년에 대한 사회안전망 강화 예산이 990억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가부의 이런 초라한 위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해 7월 이 사안이 터졌을 때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여성'가족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여가부가 손에 쥔 권한은 '성희롱 예방을 제대로 했는가' 감독하는 역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예방하지 않았다면 잘 예방하라고 '권고'만 할 수 있었다. 권고를 안 들어도 여가부가 추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다보니 박 전 시장 사건 당시 여가부가 한 일이라곤 △피해자 문제제기 뒤 보름만에 서울시 현장점검 △서울시 성폭력 예방 매뉴얼 조사 △서울시에 '피해자 보호 조치 미흡' 등 지적 △ 고위직 대상 성인지 감수성 제고 교육 권고, 이게 전부였다.
박 전 시장의 자살로 수사기관을 수사를 더 진척시킬 수 없었고, 서울시의 상급기관이랄 수 있는 행정안전부는 '선출직 시도지사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박 전 시장 사건을 두고 피해자와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곳은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였다.
'여가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여가부는 지난해 11월 지자체장 성폭력 사건은 여가부가 전담 창구를 마련해 신고를 받고, 인권위의 시정권고를 지키지 않을 경우 여가부가 시정명령을 내리겠다는 대책을 밝혔다.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제재하는 법은 이제 만들어야 한다.
전 국회입법조사관은 “조직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여가부는 공공기관의 피해자 보호 정도만 할 뿐 다른 영역은 고용노동부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 구제 등을 맡는다"며 "주무부처라는 여가부 장관이 할 수 있는 건 의견표명 밖에 없는 셈"이라 말했다.
여가부라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게 성차별에 대한 시정 업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여가부의 역할을 사실상 없다. 여성부 시절엔 남녀차별개선위원회를 두고 있었지만 참여정부 당시 각종 차별 시정 업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모두 이관됐다. 그러면서 여성부 소관이던 남녀차별금지법이 2005년 폐지됐다.
전문가들은 이 대목이 여가부 무용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김은희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위원은 "현행 법제에는 성차별 문제를 실질적으로 규율하면서 성별 등을 사유로 행해지는 차별행위를 규제하는 실체법이 없는 상황"이라 말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으니 장애인 차별 문제에는 인권위, 법무부가 개입할 수 있지만 여성 차별 문제엔 여가부가 개입할 통로가 없는 셈이다.
관할 법이 없으니 예산도 턱없이 작다. 올해 여가부 예산 1조2,325억원은 전체 예산 558조원 중 0.22%다. 여가부 예산 중에서도 여성과 성평등 정책에 관련된 예산은 2,216억원에 불과하다. 여성 관련 예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경력단절여성의 취업을 지원하는 새일센터 관련 예산으로, 702억원이다.
그 대신 요즘 거론되는 건 '성 주류화 사업'이다. 단순 불평등 해소를 뛰어넘어 주류를 지향하자는 사업이다. 하지만 이 사업도 힘을 받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 8개 부처에 양성평등정책담당관(담당관)을 임명해 부처내 성평등 관련 정책의 수립과 총괄토록 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개는 각 분야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늘었다. 더 큰 문제는 담당관이 성평등 정책의 ‘콘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의 병렬적 행정구조에서는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며 "양성평등정책담당관도 현재 과장급부터 구성돼 있는데 외부 인사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부처 내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여가부의 유명무실함을 드러낸 사안들은 많다. 지난 연말 이슈가 됐던 낙태죄 폐지 후 후속 입법을 둘러싼 부처간 갈등국면에서 정부 부처 가운데 전면에 나선 이들은 형법을 개정해야 하는 법무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하는 보건복지부였다. 여성, 가족, 모성에 대한 이슈였는데 여가부는 그저 형법상 낙태죄 완전 삭제를 주장하는 여성계의 의견을 전달하고 비공개 의견서를 내는 데 그쳤다. .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법무부와 인권위가 의견서를 내면서 법원 판결이 퇴행하지 않기 위해 견제했던 것에 비해 여가부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며 "여가부는 의견서를 비공개로 냈는데, 앞서 나가야 될 때 나가지 않는 행보가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그렇기에 여가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권한 예산 없다고 자꾸 뒤로 물러나 앉으면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사례로 꼽는다. 사건 폭로가 있은 바로 다음날 정현백 당시 여가부 장관은 “충청남도를 대상으로 직접 특별점검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권한은 작지만, 그렇기에 장관의 의지와 의사 표명이 여가부에서는 특히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가부는 좀 더 분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