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전 한반도 어딘가에 존재했을, 벼농사 공동체 ‘평수리’. 각기 다른 성(姓)을 지닌 씨족들이 모여 사는 이 곳은 ‘쌀’로 다져진 공동운명체다. 마을 어르신의 진두지휘하에 김매기부터 모내기, 수확까지 함께 한다. 집마다 소유한 땅은 있지만, 노동력은 공동으로 투입된다. 균일한 노동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세대와 가구를 넘어 기술을 가르치는 건 필수. 밀보다 두 배, 세 배의 수확량을 자랑하는 쌀 덕분에 마을 인구와 재산은 급속히 늘었다.
그래서 평수리 사람들은 모두 만족하고 행복했을까. 천만에, 협업을 하면서도 공동체 안엔 치열한 경쟁이 도사렸다. 각자 경작했으면 몰랐을 남의 집 논의 수확량, 시시콜콜한 가정 경제까지. 아는 게 병이었다. ‘나보다 남이 더 잘 살면 안 되는데’ 비교하고 질시하는 게 일상이 됐다. 벼농사만으로 승부를 보지 못하면 자식 농사로 갈아탔고, 과거에 급제한 자식이 나라에서 받아온 땅을 새로 개간해 자산을 불렸다. 이렇듯 한반도 주민의 삶에서 쌀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한국 사람들은 왜 불평등에 유독 민감할까.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나. 이철승(50)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신작 ‘쌀, 재난, 국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벼농사 체제’에서 찾는다. 한국을 비롯, 쌀 문화권을 공유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서구의 밀 문화권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다. 586 세대의 자원 독점을 정면으로 겨눈 ‘불평등의 세대’보다 시야가 한층 넓어진 셈. 이 교수는 3부작 예정인 ‘불평등 프로젝트’에 대해 “마르크스나 베버를 모셔오거나, 공자나 맹자를 다시 읽는 작업도 아닌”, “한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여정”이라고 칭했다.
앞서 평수리에서 보았듯, 밥을 먹고 사는 쌀 문화권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마을 단위의 긴밀한 협력 시스템이 특징이다. 한국 역시 협업과 ‘기술 튜닝’을 통한 표준화 시스템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완벽하게 모듈화된 공정으로 불량을 최소화한 현대자동차, 삼성 휴대폰, 흠잡을 데 없이 조율된 군무의 미학을 선보인 방탄소년단(BTS)은 대표적 성공 사례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팬데믹을 잘 방어하고 있는 것도, 강력한 공동체 조율 시스템 때문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한 의식의 발로다. “서로의 삶을 간섭하고 책임지려는” 즉, 남의 눈치를 살피는 DNA가 각인돼 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하지만 불평등 앞에선 특유의 공동체 감각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이 교수는 벼농사 체제의 집단적 위계가 남긴 강력한 유산인 연공급제(나이와 연차에 따라 자동적으로 임금이 상승하는 제도)를 한국 사회 불평등 해소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한다. 연공제 수혜자들은 불어난 여유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교육 대물림으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평수리 주민들이 옆집보다 더 잘 살고 싶어, 자식을 공부시켜 과거 급제 시키고 땅 개간에 몰두하며 사적 자산을 늘려갔듯 말이다.
문제는 남보다 잘 살겠단 욕망이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50대 중장년층의 임금이 가파르게 올라갈수록, 청년들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비정규직들은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남겨졌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이 많은 여성들에게 연공제는 고위직 진출을 막아서는 벽이다. 연공제 수혜자들이 은퇴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질까. ‘지연된 보상’을 기다리는 다음 세대가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불평등은 악화되고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은 약화된다.
대안은 직무 성취와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직무급제다. 같은 쌀 문화권으로 묶이는 중국은 물론 일본도 수십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교수는 단 한번의 시험 통과만으로도 일하지 않아도 보상 받는 연공급제보다, 직무 강도와 숙련도에 따라 정당한 임금을 받는 직무제가 공정성과 생산성 측면에서 “훨씬 더 정의롭고 효율적인 불평등”이라고 설명한다.
‘보편적 사회안전망을 갖춘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이 교수의 새로운 강조점이다. 벼농사 체제는 국가의 역할을 재난 대비 ‘구휼국가’에 한정시켰다. 평시 나라님의 역할은, 농업 생산력을 확대하기 위한 ‘물 관리’ 하나면 족했고, 가뭄 등 재난이 터지면 피해를 입은 마을을 선별적으로 구제하는 게 전부였다. 병들거나 다치고 굶주린 자를 책임지는 복지는 국가가 아니라 가족과 씨족의 몫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에 기댈 수 없는 한반도 정주민들은 사적 자산 확보에 매달리고 있다. “재난이 일상화되고, 불평등이 전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21세기, 부모세대처럼 우리 또한 각자 도생 프로젝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이 교수는 동년배들에게 묻는다.
올해 나이 50. ‘불평등의 세대’를 쓰고 이 교수는 동년배들에게 전방위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또 다시 연공제 철폐로 ‘50대 양보론’을 들고 나온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막막해하던 한 젊은이의 울먹임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다시 한번 묻는다. “내가 강연에서 만난 젊은이는 우리의 남이냐고. 우리 자식들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세상을 원하냐고. 이 마을이 쌀밥에 고깃국을 계속 먹을 수 있을것 같으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