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흔하디 흔한 정치인들의 기싸움인 것 같죠.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듣고 정색하기엔 농담조고, 피식 웃기엔 살벌한 이 말. '공업용 미싱'.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요?
맞습니다. 때는 23년 전으로 흘러갑니다. 1998년 5월 26일 김홍신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죠. 그는 당시 경기 시흥 정당연설회에서 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즉각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대통령까지 비방한 김 의원의 발언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김 전 의원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습니다. 국민회의는 또 김 전 의원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키로 하는 한편 김 전 의원의 의원직 자진사퇴와 한나라당의 사과 및 김의원 제명 조치를 조순 한나라당 총재에게 요구했습니다.
청와대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경기지사 선거에서 김대통령과 임창렬 후보 부인을 허위 비방한 흑색선전물 3건이 공공연히 유포되고 있다"며 "이를 끝까지 추적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라고 말했습니다.
김 전 의원은 비난이 거세지자 당황한 듯한 모양새였습니다. 당내에서조차 "심했다"는 반응이 나오자 이틀 후인 28일엔 아예 언론 접촉을 피했습니다. 파문의 조기 진화를 위해 전날 밤 "시중의 우스갯소리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통령과 여권에 정서적 상처를 주었다면 유감"이라고 사실상 사과를 하긴 했습니다.
한편 미싱은 재봉틀의 일본말로, 주로 고단한 노동을 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물건이죠. 공장 노동자들을 비하할 때 종종 쓰이기 때문에 단순히 '재봉틀'로는 해석할 수는 없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 그의 서초동 자택과 의원회관에는 이날 아침까지 욕설과 항의전화가 빗발쳐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가족들은 "몸이 불편해 쉬고 있어 통화할 수 없다"고만 말했습니다. 한나라당도 겉으로는 "본인 스스로 해명했으니 된 것 아니냐.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제명하라는 것은 신권위주의"라고 말하면서도 선거에 악재가 될 것을 우려하는 눈치였다고 하네요.
한편 서울 광장동에 사는 김모(39)씨는 김 전 의원의 발언에 흥분, "어디 한번 미싱으로 뭘 박는지 보자"며 28일에 10만원 상당의 가정용 미싱을 사서 택배로 이날 오전 의원회관으로 보낸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회 경위들이 "수신인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며 이를 되돌려 보내버렸죠.
이튿날에는 직접 공업용 미싱을 전달키 위해 상경하는 해프닝도 벌어졌습니다다. 이날 오후 6시쯤 공업용 미싱 1대를 실은 갤로퍼 승용차를 직접 몰고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당사를 찾아온 경남 사천의 한 철물점 주인이 국민회의 당직자들에게 "의원에게 공업용 미싱을 전달하려는데 주소를 모르니 가르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국민회의 당직자들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꺼리자 당사건물 경비원을 통해 주소를 알아낸 그는 "여야를 떠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대통령에게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김 전 의원을 비판했죠.
'공업용 미싱 발언'을 두고 여야의 공방은 계속됐습니다. 한나라당은 같은 해 6월 1일 "지나친 표현은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 풀어나갈 문제"라며 "선거가 끝난 뒤 김 의원을 검찰에 출두케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비판적 여론으로 인한 수세에서 벗어나, 역공을 취하겠다는 의도죠.
이에 대해 여당인 국민회의는 김 전 의원이 '성역없는 비판론'을 주장한 데 대해 "가당치않은 언어의 유희"라며 발끈했습니다. 신기남 당시 대변인은 "석고대죄해도 시원치않은 마당에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죠.
5일 후에는 한 외신기자가 '김 의원의 발언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게 아니냐'라고 묻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한다는 발언 때문에) 며칠 동안 이 근처가 자꾸 이상했다. 너무 심했다"고 받아넘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처벌은 둘째치고, 인신 공격을 해도 선거가 끝나면 그만인 풍토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호남의 대표적 재야 인권변호사로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고 홍남순 변호사가 김 전 의원의 변호를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고 홍 변호사는 의원회관 사무실로 김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진정한 민주화는 말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인데, 말같지 않은 일로 고생이 많으니 내가 변호를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졌습니다.
홍변호사는 아들인 홍기훈 전 의원의 공천 문제등으로 1996년 이후 김 전 대통령과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해 왔죠.
결국 1999년 7월 2일 서울지검 공안1부 임성덕 당시 검사는 김 전 대통령을 모욕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김 전 의원에게 모욕 부분에 대해서만 징역 1년을 구형했습니다.
이날 재판에서 김 의원은 최후진술을 통해 "검찰조사를 받는 한 시간 동안 당시 검찰총장으로부터 3,4차례나 전화가 걸려온 사실만 보더라도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알 수 있다"며 "김 대통령을 모욕할 의사는 전혀 없었으며 역대 대통령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김 의원은 형법상 모욕죄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편 공업용 미싱 발언은 김홍신 전 의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1998년 9월 11일에는 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 수석부총무가 당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비상대책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는 등 거짓말을 너무 잘해 김홍신 의원이 말한 공업용 미싱이 다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또다시 공업용 미싱을 언급했죠. 당시에도 국민회의는 크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23년 전의 '미싱' 발언은 이번과는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당시에는 대통령의 신체를 꼬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이었다면 이번에는 "선물로 보낸다"며 돌려서 비판한 데 활용한 것이죠.
'공업용 미싱' 발언,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정치인의 원색적 막말일까요. 여야 정치인들의 신경전이 담긴 정치적 표현일까요. 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