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표지판을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한 나라를 인지하는 방법은 표지판으로도 가능하다. 멈추라는 ‘주의’나 ‘경고’가 때로는 자꾸 나아가게 부추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긴장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세상의 표지판을 모았다.
헤디온다 호수는 볼리비아에서 우유니 3일 사막 투어에서 감동을 안기는 곳이다. 눈처럼 하얀 소금밭에서 안데스 산맥을 배경으로 날갯짓하는 플랑밍고가 현미경으로 보듯 선명한 자태를 뽐낸다. 남녀의 노상방뇨 및 흡연, 음료 섭취 금지가 그려진 검은 표지판까진 이해했다. 그러나 호수 위를 나는 플라밍고에 그어진 빨간 줄은 무엇일까. 말이 통하지 않는 홍학에게 날지 말라고 경고하는 표시일까, 아니면 여행자에게 새를 만지지 말라고 충고하는 걸까? 알 수 없다. 하기야 이해 불가한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는 볼리비아와 퍽 닮았다.
호주는 각종 표지판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캥거루 그림은 수시로 만나고, 주 경계를 넘을 때마다 또 다른 동물 표지판이 등장한다. 한국보다 약 77배 큰 땅덩어리라는 걸 실감한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르는 무념의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표지판에 그려진 동물을 보고 다른 주로 넘어왔음을 알게 될 정도다. 일종의 미션이자 게임 같다. 저 표지판의 동물을 실제 만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개체를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될까. 게임의 난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아무리 운이 없는 사람도 반드시 표지판 속 야생동물을 만나게 돼 있다.
남아메리카 최남단 파타고니아엔 최고의 트레킹 코스임을 자부하는 쌍두마차가 있다. 바로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그리고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선에 우뚝 선 피츠로이산이다. 토레스델파이네에는 차를 몰고 달리다가 한 지점을 치고 빠지는 짧은 트레킹 코스가 펼쳐진다. 살토그란데(Salto Grande)를 방문하기 전, ‘차박’ 장소를 물색하다가 눈을 의심케 하는 정보를 읽었다. 1톤은 거뜬히 넘는 풀옵션 캠핑카가 옆으로 픽 쓰러져 있다. 주차된 차 대부분이 기관총에 난자된 듯 유리창이 박살 나 있었다. 바람의 신이 주범이다. 이곳 좁고 날카로운 협곡에서 차를 밀어붙이는 바람의 속도는 시속 120㎞에 달하기도 한다. 트레킹을 할 때에도 몸이 풍선인형처럼 제멋대로 춤을 춘다.
도로에서 낙상하는 고약한 상상을 거듭한 뒤에야 나타난 사막 속 오아시스. 입이 바싹 마르는 모래바람이 부는 가운데, 초록빛 야자수와 호수가 수영하라 유혹한다. 봄빛 이파리를 녹인 듯한 물 빛깔이다. 단, 복장에 조건이 있다. '민소매 금지, 무릎 공개 자제'다. 좀 더 깊은 협곡으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저 신성한 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것은 유죄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뛰어들었다. (마침 보유한 수영복이라고는 비키니 밖에 없어서) 정직한 여행자로서 입은 복장 그대로 풍덩! 그 나라의 문화는 소중하니까.
산타아나는 엘살바도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커피 원두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여행의 중심축이 되는 자유광장(Parque Libertad)으로 갔다.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자유를 표방하는 여신상이 식민지시대 콜로니얼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 순간 반경 100m에서 질주하던 한 사내가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고 있었다. 아, 여기는 중미의 갱단으로 이름을 날리는 나라였지. 그제야 광장 한가운데 권총 금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마치 음주 금지 안내판처럼 자연스러운데 볼수록 의문이다. 소지 금지일까, 발사 금지 일까?
하푸탈레는 스리랑카에서 눈 호강하는 여행지로 빠지지 않는 ‘풍경 깡패’다. 안개에 포획 당한 초록빛 차밭에 언뜻 꽃이 핀 듯했다.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찻잎 담을 자루를 머리에 건 채 예술적으로 손을 놀린다. 층층 계단의 농장을 달리는 환상에 빠진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았다면 깨어 있으라. 도로 양 옆 차밭 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노동자가 있으니. 한국에서 어린이 보호구역의 제한 속도가 시속 30㎞인 것을 고려하면, 시속 12㎞는 얼마나 인내가 필요한 속도인지 짐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