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는 바이올린 소나타 3개를 남겼다. 낭만주의를 풍미했던 독일 대표 작곡가 치곤 적은 편인데, 완벽주의 성향이었던 그가 엄선된 작품만 출판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네 곡 가량 소나타를 더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별 다른 수식어가 불필요한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는 낭만주의 음악에 강하고, 그 중에서도 브람스를 특히 사랑하는 연주자다. 1997년에 발매된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은 '디아파종 황금상'을 수상한 불후의 명반으로 꼽힌다.
완벽주의 작곡가가 남긴 소나타와 일흔이 넘은 거장의 만남. 정제된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19일 서울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듀오 리사이틀은 그런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에서 정경화는 브람스 소나타 1~3번을 전곡 연주했다. 당초 지난 12월 계획됐으나 코로나19 탓에 이날로 연기됐다. '바이올린 여제'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관객들로 좌석은 매진이었다.
첫 곡이었던 소나타 1번은 우수에 젖은 바이올린 선율로 부드럽게 시작했다. '비의 노래'라 불리는 1번은 실제로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닮은 곡이다. 장대비라기보다는 안개비에 가까운 우아한 선율이 돋보인다. 1악장은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의 '비바체 마 논 트로포(Vivace ma non troppo)' 연주다. 여섯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60년이 넘는 시간 활을 그었던 거장은 악상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정제된 활쓰기와 감정표현은 수십년간 음악에 몸 담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였고, 연륜이었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바이올린을 위해 쓰인 곡이지만 피아노의 반주가 필요하다. 피아노 연주자는 때론 단순 반주 역할을 넘어 주연이 돼야한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그렇다. 그래서 소나타 연주는 리사이틀뿐만아니라 '듀오'의 성격도 있다. 정경화가 점지한 연주자는 최근 '대세 피아니스트'로 떠오른 김선욱이었다. 이날 둘의 호흡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악장과 악장 사이 악보를 넘기는 동안 정경화와 김선욱은 환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1번에 비해 비교적 밝은 느낌의 소나타 2번은 비온 뒤 맑은 날을 표현하는 듯했다. 정경화의 활은 검사의 칼처럼 다부지게 변했다. 보잉(활쓰기)도 1번에 비해 더 역동적으로 펼쳐졌고, 정경화 특유의 불꽃같은 표현들이 이어졌다. 앞선 두곡과 달리 단조(D 단조)로 쓰인 3번 소나타는 심오했다. 특히 2악장은 전설적인 경지에 오른 연주자의 심오함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과르네리 악기의 G(솔)선에서 울려 퍼진 비브라토(현을 위아래로 떨게 만드는 주법)는 원숙미 그 자체였다.
류태형 클래식 평론가는 정경화를 두고 "전성기 시절 보여줬던 날카로운 해석과 극단의 디테일보다는, 전반적으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줬다"면서 "나이듦의 순리를 받아들인 정경화 선생님의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김선욱의 연주에 대해서도 "마냥 바이올린 연주자를 배려한 게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적극 담아냈다"면서 "독일 작곡가들의 래퍼토리에 강한 김선욱의 기량이 공연을 살렸다"고 평가했다.
이날 공연에서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라는 주제에 부응하는 위트도 있었다. 정경화는 앙코르 무대에서 슈만의 'F.A.E 바이올린 소나타' 중 3악장(스케르초)을 연주했다. 슈만의 곡이지만 3악장은 슈만과 음악적 동지였던 브람스가 썼다.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여제는 코로나19 때문에 쉽지 않은 발걸음을 해준 관객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앙코르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직전 정경화는 "다 아시는 곡"이라는 짧은 설명과 함께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켰다. 곡이 끝나고 연주자는 무대에서 동서남북 객석 방향을 향해 양손으로 크게 하트를 그렸다. 정경화식 사랑의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