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강대강' 발언은 결국 미국에 도움 달라는 메시지"

입력
2021.01.14 20:00
24면
[김범수의 응시]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인터뷰

미국 정권 교체 이후 북미 관계를 가늠할 행사로 주목받았던 북한 노동당 제8차 당대회가 12일 끝났다. 4년 8개월 만에 열린 이번 대회의 보고, 토론 내용을 정리한 결정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행사 기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개회사, 결론 연설 등을 통해 '경제 재건'과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다. 지난 7차 당대회에서 설정한 핵·경제 병진 노선을 재확인한 모양새다.

특히 김 위원장은 경제 문제와 관련해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는 이례적인 반성으로 시작해 "가장 중요한 혁명 과업"이므로 "시급히 풀어야 한다"는 연설로 매듭지었다. 지난해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해온 '자력갱생'의 각오를 거듭 다지겠다는 의미다. 국방력 강화는 "적대세력이 우리를 겨냥해 핵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신형 핵무기 개발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핵보유국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뜻도 드러냈다.

대미, 대남 관계 언급은 최근 몇 년 사이 북미, 남북 대화 분위기를 감안하면 표현에 날이 서 있긴 했으나 원론적인 언급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으로 조성된 한반도 평화 무드가 하노이 북미 회담 실패 이후 진척을 보지 못하고 2년 동안 계속 식어만 간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14일 서울 장충동 민주평통 사무처에서 만나 이번 당대회 결과와 향후 북미, 남북 관계에 대해 들었다.


-북한 노동당대회에서 주목할 부분은 무엇인가.

“노동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결과 등을 볼 때 사람을 많이 바꾸어 세대 교체를 했다는 점이다. 박봉주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나고 그 빈자리에 상대적으로 젊은 조직부장 출신 조용원을 앉혔다. 당대회 참석 대표들도 전반적으로 젊어졌다. 북한은 지난해 8월 정치국 회의에서 당대회 개최를 공표한 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검열 소조들이 각 지역에서 간부들의 행정 능력, 스타일을 점검해 교체했다. 경제발전, 군사력 강화 등 향후 국정 방향에 맞춰 일선에서 뛸 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김 위원장은 올해로 집권 10년차를 맞는다. 그 동안 할아버지대, 아버지대부터 일했던 사람을 서서히 교체해왔는데 이번 대회를 계기로 아예 자기 사람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다.”

-위임통치설까지 나왔던 김여정은 서열이 낮아졌다.

“김여정은 정치국원 승진은 고사하고 기존 후보위원에서도 탈락해 중앙위원 서열 20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6월 대남 강경 담화를 쏟아낸 것은 물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폭파했다. 그 뒤로도 대남 전단을 뿌리겠다거나 북방한계선에서 군사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발언도 했는데 김정은이 보류시켰다. 김여정식으로 했다간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널지 모르니 자제시킨 것이다. 그 뒤로 잠잠하다 최근 강경화 외교장관의 코로나 관련 발언 등을 또 공격했다. 김정은으로서는 국내 경제 때문에라도 남북 관계 물꼬를 터야 하는데 아무리 동생이라도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잠시 뒤로 물린 것이 아닌가 싶다. 대남 사업을 하는 통전부장에 김영철이 복귀했지만 비서를 달지 못해 강등됐다. 외무성에서 대남·대미 강성이던 최선희도 중앙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대외 강경파들의 격을 낮춘 것은 남쪽과 미국을 향해 잘해보자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핵 선제 및 보복 타격 능력 고도화”를 목표로 핵잠수함, 다탄두미사일, 극초음속 무기 등 전략무기 개발 의지까지 내보였는데 이게 잘해보자는 뜻인가.

“북한의 공식 입장은 때로 뒤집어 해석해야 한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북한을 44년째 연구해 왔는데 겉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해석하면 엉뚱한 대책을 낼 수 있다. 북한이 ‘강대강’이라는 말을 썼다. 미국이 세게 나오면 우리도 받아치겠다는 것이고 그를 위해 핵능력 강화를 명시한 거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행동하면 미국을 망신 줄 수 있다는 거지만, 그런 일 벌어지기 기다리지 말고 빨리 핵 문제를 비롯한 북미 관계 협상을 시작하자는 뜻이 담겼다. 힘이 약해 허풍이 센 측면도 있다.

북한 정권은 미국이 언제 자기네를 칠지 모른다며 그동안 체제를 다져왔다. 그런 의미에서 대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여전히 그것만큼 주민을 안심시키는 것이 없다. 북한 주민들이 믿고 따르도록 하기 위한 체제 응집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럼 핵무기 고도화는 다 거짓말인가.

“중요한 건 그런 발언의 진짜 속내다. 대응 시간을 끌면 결국 미국이 내놓아야 할 보상만 커지는데, 그래도 사정 변경이 없으면 북한은 그 길로 갈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북한이 핵능력을 강화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미국을 설득해서 빠른 시간 내에 대북 정책 우선순위가 높아지도록 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가 우선 한국과 이야기하고 있어라, 곧 만나겠다는 사인을 북한에 보낼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미국을 “최대 주적” “전쟁 괴수”라고 공격했다. 사실상 바이든 정부를 향한 첫 메시지 치고는 호의적이지 않다.

“북한이 향후 5개년 경제계획을 내놓겠지만 대북 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지난 7차 당대회에서 확정했던 전략이 거의 모든 부문에서 미달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도 제재 때문이다. 앞으로 5년 동안 지금의 북미 관계로는 북한은 한 발짝도 못 나간다. ‘강대강’이라고 했지만 ‘선대선’이라는 말을 함께 쓴 것은 결국 도움 달라는 메시지다. 핵전략 강화는 대책 아닌 대책일 뿐이다.”

-남북 관계가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갔다며 “첨단 군사 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 군사연습”을 문제 삼았는데.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건 그때처럼 봄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로도 읽을 수 있다. 남북 관계에 봄날이 와야 북한도 사정이 펴는 것이고 그걸 디딤돌로 워싱턴으로 갈 수도 있다. 판문점선언이나 평양선언, 9ㆍ19군사합의서 등은 북한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미국이 워킹그룹 등을 앞세워 이와 관련된 협력을 통제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남북 관계는 지금보다는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2년이 흘렀는데 미국 정권도 바뀌었으니 방역이나 개별관광, 인도적 지원 같은 것보다 우선 기존의 남북 합의를 이행하는 모멘텀을 만들라는 얘기다.

북한이 한미훈련을 거론한 것은 그런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보여 달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다. 그들도 동계훈련은 하지만 거의 몸으로 때우는 식의 극기훈련 수준이다. 나라 전체가 석유 30만, 40만톤 간신히 조달하는 마당에 탱크나 트럭 같은 걸 움직이려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기름도 아끼고 그 군사력을 공사 현장에 보낼 수도 있다. 최소한 남쪽에서 기동훈련이라도 하지 않으면 좋은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기동훈련을 하려면 미국 본토에서 다수의 미군이 와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라도 지금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어차피 보통 때처럼 훈련하기에 제약이 많은 상황이라면 미국과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의해 올해 훈련도 안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 북한도 문재인 정부가 그래도 아직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구나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트럼프 때 북미정상회담의 다리를 놓았던 것처럼 한국이 움직여서 무언가 만들어 낼 힘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 인식시켜야 한다."

-자기들은 신형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우리의 전략 자산 확충은 비난한다.

“군사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한미 동맹 차원에서 미국 무기를 사들여 오지 않을 수 없게 된 부분이 있다. 북한이 핵능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전략자산을 가지고 와서 필요하면 감시할 수는 있다. 대통령이 국민을 안심시키는 최선의 평화 유지 조치는 해야 한다. 북한이 자기들 핵무력을 강화하면서 남쪽이 전략자산 가지고 오는 것을 두고 본심이 뭔지 털어놓으라는 것은 ‘내로남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북 제재로 한계가 분명한데도 북한은 자력갱생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유엔 대북제재를 풀어주지 않으면 자급자족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주민들에게 시키는 것이다. 지난해 노동신문에 간부들은 책상에 앉아 있지 말라거나 젊은이들은 응석받이가 되지 말라고 혼내는 기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부지런히 현장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을 지난해 8월부터 4개월 동안 분석해 이번 당대회에 대표로 올라오게 했다. 최악의 조건을 상정하고 그에 대비하려는 목적이다.”

-바이든 정부에서 북미 회담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개될 수 있을까.

“바이든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가동되려면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 국내 문제가 우선 큰 짐이고 대외 정책도 중동이나 기후변화 대응 등 굵직한 과제가 산적했다. 대북 문제는 미국 대외정책에서 최우선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볼 때 동북아가 갖는 의미는 서유럽보다 훨씬 크다. 중국 때문이다. 멱살잡이하자고 덤비는 중국을 견제하는 최전방 초소가 주한미군이고 한반도다. 결국 한반도 문제는 북핵과 표리 관계다. 이를 방치해 북한이 공언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북핵 관리는 더 어려워진다. 중국은 북중 관계를 돈독히 해 북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압박하려 할 것이다. 미국의 동북아 헤게모니 약화를 막으려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나서야 한다고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에서 대북 정책이 후순위로 밀릴 경우 조급해진 북한이 무력 도발할 가능성은 없나.

“관심 끌기 위해 핵실험이나 다탄두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다. 미국을 향해 쏘는 것은 아니고 시험발사 수준이겠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북한과 방역 대화를 다시 말하면서 김정은과 언제, 어디서든 비대면으로라도 만나겠다고 했다. 북한이 이를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평가절하했는데 또 꺼내니 답답하다.

“비본질적인 문제라는 거지 안 받겠다는 말이 아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방역 협력은 북한도 절실히 바라는 문제다. 조류인플루엔자나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것도 남북을 포함해 지역 차원에서 공동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존심 상해서 지금은 말 못 하지만 지난해 수해로 농사를 망친 것도 있고 해서 북한은 3, 4월 보릿고개가 심각할 것이다. 식량 지원도 필요하다. 국제기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지원하는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쌀과 비료 보냈더니 북한에서 ‘동포가 아니면 이 비바람 치는데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하더라. 금강산 번듯하게 새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외자유치 없이 되겠나. 이런 문제도 남한이 도움을 주기 바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쉬운 것부터 하자는 거고 북한은 군사문제부터 해결해 달라는 건데, 때가 되면 접점이 생길 거다.”

-남북 관계에 돌파구를 만들려면 북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느닷없이 김정은 답방 추진 이야기도 나온다.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해 볼만 할까.

“정상회담은 지금 단계에서는 피차 쉽지 않다고 본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군사분야 고위급 회담하자고 하면 북한이 나올 수도 있다. 9ㆍ19합의대로 군사 긴장을 완화해야 경제협력도 활발해질 수 있다. 자동차나 기차, 배가 남북을 오가려면 군사적 대화가 우선이다. 그걸 바이든 정부의 외교 안보 실무진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 정부가 먼저 작은 발걸음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군사적 대화에 진척이 있으면 방역, 삼림 협력에도 힘이 붙을 것이다.”

김범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