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학살 의혹 앞에 선 한국 법원

입력
2021.01.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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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국가 간의 역사 문제 소송은 관련국에도 파문을 일으킨다.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역한 자국민이 제기한 독일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최종 승소 판결했다. 이후 우리는 같은 전쟁에서 발생한 위안부 문제를 떠올리며 '국가(주권)면제론'에 대한 국제법 흐름을 면밀히 주시했다.

16년이 흐른 뒤 한국 법원 역시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같은 소송에서 할머니들의 손을 처음으로 들어줬다. 주권면제론을 인정하고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단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기능하지만, 피해자 인권에 대한 한국 법원의 단호함은 법적 논란과 상관없이 박수 받아 마땅할 결정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한국을 거친 역사 소송의 파고는 이제 베트남까지 닿는다. 안타깝게도 이번엔 한국이 가해 세력으로 의심받는 처지다. 1968년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 사건과 관련해 지난해 4월 베트남인 피해자가 한국 법원에 정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소송과 상관없이 베트남도 자국 법원에서 판단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로 책임 회피는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법원에선 타국울 상대로 손배소가 제기된 적이 없고, 할 방법도 없다. 베트남전 관련 소송은 한국 법원이 유일한 법적 통로인 것이다.

다행히 한국 법원은 "우리는 일본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앞서 1ㆍ2심 재판부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국가정보원의 문서 목록을 공개하라"는 행정소송에서 총 4번에 걸쳐 모두 공개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본처럼 소송 자체를 회피하지 않고 적어도 사실관계 파악의 길을 열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이 소송 외에는 손해를 배상 받을 방법이 요원하다"는 말로 일본 정부를 준엄히 꾸짖었다. 이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시간이다. 법의 공명정대함을 증명하는 것은 다시 한국 법원의 몫이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